HOME                로그인

2019 ‘용서와 화해의 해’ 선교신앙수기 공모 우수작 ①
돌발성 난청


글 박지연 그라시아 | 동촌본당

 

2007년 5월 어느 날 아침, 여느 때와 같이 일어났는데 오른쪽 귀가 먹먹하니 마치 물이 들어간 것 같은 느낌에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날은 경북 구미에 출장이 잡혀 있던 터라 일을 끝내고 급한 김에 구미 시내의 한 이비인후과에 들러 진료를 받았다. 청력검사를 하고 의사 선생님이 귓속을 들여다보고는 돌발성 난청이라며 이대로 두면 청력이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고 좀 더 큰 병원을 가보란다. 살짝 겁이 났지만 그래도 설마 좋아지겠지 싶었는데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점점 더 심해져만 가고 좀체 나아질 것 같지 않아 대구에 있는 이비인후과에 들렀다. 결론은 소견서를 써줄 테니 더 큰 대학병원으로 가보라는 이야기였다.

대학병원에서도 검사를 받아 보니 역시나 돌발성 난청! 원인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고, 원인이 없을 때는 대부분 신경성 스트레스로 본다고 한다. 치료방법으로는 스테로이드 약물요법과 주사요법을 병행해야 한다고 했다. 젊은 사람이라 호전될 가능성은 높지만 돌발성 난청은 원인이 없는 만큼 완벽하게 치료하는 것도, 재발이 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다는 말에 가슴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주사요법은 목을 관통해서 신경선에다 주사를 놓기 때문에 한쪽 눈꺼풀이 내려오는 안검하부 증상과 안구충혈이 동반된다고 했다. 거울 속 내 얼굴은 정말 끔찍했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잘못하면 내가 청각장애자가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과 왜 하필 이런 일이 생기는지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그 당시 나는 남편과 이혼소송 중이었다. 다섯 살 딸아이와 당장 필요한 짐들을 정리해 친정에서 머물며 합의가 안 되는 남편을 상대로 법적 절차를 밟아가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가난한 집안 형편 탓에 부모 도움 없이 웬만한 일들은 스스로 해결해가는 독립심 강한 딸로 자랐다. 일과 공부를 병행하면서 살아가는 나를 보며 집안 식구들이며 친구들, 그리고 사회에서 만나는 주변사람들까지도 모두 한결같이 ‘너는 진짜 앞으로 잘 될 거야, 나중에 정말 잘 살 거야.’라고 했다. 지금은 아니지만 앞으로는 잘 될 것이라는 격려와 희망이 나에겐 지칠 때마다 견딜 수 있는 힘이 되었다. 결혼을 할 때도 나름대로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한 결혼이었다. 그러나 막상 결혼을 하고 보니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돈 없이 벌인 남편의 사업이 얼마 되지 않아 문제가 드러났다. 들어오는 돈보다 나가야 할 돈이 더 많았고 카드대출도 돌려 막기가 한계에 이르자 급기야 집으로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생활은 말할 수 없이 불안했고 아이를 키우기에는 쥐꼬리만한 내 월급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남편 얼굴만 봐도 싸우게 되고 왜 이렇게까지 만들었냐고 추궁하며 원망만 하게 되었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했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 없다는 남편과 결국 합의가 안 되어 법적으로 이혼절차를 진행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결혼한 지 5년 만에 33세의 이혼녀가 되었고 아이를 혼자 키우며 사는 한부모 가정의 가장이 되었다. 사회적인 인식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남편 없는 여자는 심리적으로 벌써 위축되는 게 사실이다. 어디서나 스스로 떳떳하기 힘들었다. 내 스스로 선택한 일이었지만 아이를 양육한다는 것이 친정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고 애초에 친정 부모님마저 계시지 않았다면 이혼이 현실적으로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불행 중 다행으로 돌발성 난청은 조금씩 나아갔고 괴롭히던 이명 증상도, 큰소리가 날 때 따라오던 통증도 점점 좋아졌다. 너무나 감사할 일이다. 난청과 이명 증상을 겪으면서 나는 청력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았고, 들리지 않아 불편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그런 경험을 할 수 없었다면 그들이 겪는 불편을 헤아릴 수 있었을까? 지금까지 나 혼자 잘난 줄 알고 살았던 것 같다. 자만이고 교만이었다. 비록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어도 내가 노력해서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원하는 거 다 이루고 살지 않았던가. 노력하지 않은 사람은 불행해도 된다고 마땅히 받아들여야 된다고 생각했고 심지어 그 사람들을 비난하고 무시하기까지 했었다. 그런 내가 이제 결혼에 실패한 빈털터리 애 딸린 이혼녀가 되었다.

 

다섯 살이 된 아이를 동촌 성모유치원에 입학시키고 학부모 설명회가 있던 날 나는 수도복을 입은 사람을 난생처음 가까이에서 보게 되었다. 가톨릭 사립유치원이란 건 알았어도 저렇게 연세 드신 수녀님이 원장님일 줄은 몰랐다. 연세가 지긋하신, 어느 집안에서나 한 분씩 계실 것 같은 할머니와 같은 느낌이랄까? 인자하신 미소와 다정하고 부드러운 말씨로 당신을 소개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다.

그날의 강의 내용은 뜻밖이었다. 죽음을 얼마나 잘 맞이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셨기 때문이다. 한 번도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지 못했고 죽음을 준비해 본 일도 없었던 내게 지금 내가 죽더라도 아이 혼자 잘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치라는 내용이었다. 40년 넘게 유아교육에만 몸담고 일해오신 그분의 교육철학이 그 말속에 다 녹아 있었다. 아이를 바르게 키우려면 부모부터 우선이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내 아이를 위해 내가 죽기 전 해야 할 일들을 잘 해내기 위해 고민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아빠없이 혼자 아이를 키워야 하는 나에게 그 말씀은 정말 정신이 번쩍 들게 했다. 입고 계신 수도복이 눈에 들어왔다. 저분은 어째서 저 옷을 입고 그 긴 세월을 사셨을까? 저분이 믿고 따르는 신은 어떤 분이실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아이가 기도 손을 하고 성호경을 배워오고 식사 전 기도를 배워왔다.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기도손을 모은다. 덩달아 나도 따라해 보았다.

 

두 달이 지난 6월의 어느 날 동촌성당에 예비입교자를 초대한다는 현수막 문구를 보면서 딸아이와 함께 환영식이 있던 날 동촌성당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 머쓱했지만 마당 한편에서 입교자들의 가슴에 코사지를 달아주며 인사하시던 한 자매님이 반갑게 맞아 주셨다. 인도자 없이 혼자 왔다고 했더니 놀라시며 “이게 웬 복이래. 호박이 넝쿨째 저절로 굴러 들어왔네.” 하면서 난생처음으로 미사를 드리게 된 나에게 이것저것 알려주시며 챙겨주셨다.

그렇게 예비신자 교리반에 들어가 6개월간 한 번도 빠짐없이 출석하고 노트에 필기까지 해가면서 열심히 교리수업을 들었다. 기다리던 세례식 날짜가 가까워 오는데 세례명도 정하지 못하고 대모가 되어줄 사람도 없어 걱정이 되었다. 아무리 눈을 씻고 둘러봐도 내 주변에는 천주교 신자가 한 명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교리수업을 해주시던 선생님께 부탁을 드렸더니 감사하게도 대모가 되어 주시겠다고 하셨고, 세례명을 ‘그라시아’로 결정하게 되었다.

세례를 코앞에 두고 가정법원에서 편결문이 집으로 송달되었다. 이혼이 성립되었고 양육권, 친권 모두 엄마인 내가 가진다는 내용이었다. 드디어 법적으로 공식적인 이혼녀가 된 것이다. 대모님께 아직 말씀 드리지 못했던 나의 지난 일들을 말씀드렸다. 혹시나 세례 받는 데 문제가 있을 수도 있으니 미리 말씀 드리는 편이 좋을 듯 했다. 다행히 세상에서의 이혼은 교회법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만약에 재혼을 하게 될 경우는 상대가 반드시 신자여야 관면을 받는다고 하는 것 같았다.

2007년 12월, 주님 성탄 대축일을 이틀 앞두고 나는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나 같이 자격 없는 사람이 천주교 신자가 되게 해주신 것에 너무 감사하고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교리반에 입문해 세례를 받기까지 그 모든 과정을 항상 함께 해주신 나의 대모님은 깊고 넓은 바다와 같은 분이시다. 내가 어떤 상황이라도 안아 주시는 엄마 같은 분이시다. 성모님을 닮으신 분, 고통 속에 힘들게 내민 손을 마다하지 않고 두 손 내밀어 맞잡아주신 분, 안아주시며 위로해 주신 분, 그 사랑은 눈빛만으로도 느껴졌다. 나의 사정을 아시다보니 다른 대녀들도 많으시지만 각별히 나를 챙겨주셨다.

세례식 날 대모님께서 준비해 주신 미사보를 머리에 처음 썼을 때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지금도 대모님을 생각하면 너무 감사하고 받은 사랑에 보답해 드리지 못해 늘 마음 한 곳이 죄송스럽다. 성당을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자모회에 가입해 주일학교 아이들의 간식봉사활동을 했다. 그러다가 자모회 총무직을 시작해 사목회에서 서기도 맡게 되었다. 봉사한다는 것이 어떤 마음으로 일해야 하는 것인지도 알게 되고, 사목회에서 봉사하다 보니 교회 전례나 교회 행사에 대한 의미도 많이 알게 되어 오히려 배우는 것이 더 많았다. 직장 다니랴, 아이 키우랴, 봉사까지 정신없이 바쁘지만 한편으론 재미나고 신나게 열정적으로 성당을 다닌 듯하다.

세례 받은 지 7년이 지나 직장을 그만두고 조그마한 장사를 시작했다. 그곳에서 지금의 남편을 알게 되었다. 재혼을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막연하게 ‘만약 재혼을 한다면 꼭 성가정을 이루고 싶다.’는 마음은 있었다. 그 사람에게 가톨릭교리를 듣고 세례를 받는다면 재혼하겠노라 했다. 남편은 동촌성당에서 6개월 동안 주일마다 빠짐없이 교리를 들었다. 2014년 11월 본당신부님의 면담을 거쳐 세례성사와 혼배성사를 받았고 딸아이와 함께 우리는 성가정을 이루었다. 남편의 세례명은 내 축일 날과 같은 날의 성인으로 ‘오트마로’라는 흔치 않은 세례명으로 결정했다. 하늘의 뜻인지 세례식 날이 우리 두 사람의 축일이었다. 이렇게 날짜가 맞은 것은 지금 생각해도 신비롭다. 축일에 서로가 서로에게 축하를 하고 혼배성사의 의미를 되새기며 감사히 살라는 하느님의 은총이신 듯하다. 우리는 원룸에서 월세로 시작해 세 번의 이사를 거쳐 작은 방이 3개인 지금의 집에 살고 있다. 물론 지금도 임대한 집이지만 딸아이에게 방을 만들어 줄 수 있게 되어 기쁘고 감사하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 어쩌면 또 다른 나를 보는듯한 사람, 가진 것이 있기는커녕 둘 다 장사하느라 생긴 빚만 있던 상황에 우리는 시작했다. 이기적인 나에게 사랑을 가르쳐 준 사람, 내가 열 번을 물어도 열 번을 모두 처음처럼 친절하게 답해 주는 사람, 아이 교육에 도움이 되고 본보기가 되어 주는 사람, 내 뜻을 따라 불교였던 사람이 가톨릭교리를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고 새롭게 태어나 준 사람, 내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어디든 마다하지 않는 사람, 내가 틀렸거나 잘못을 했을 때도 나무라지 않고 들춰내지 않는 사람, 자기가 낳은 딸은 아니지만 딸아이를 제 자식처럼 사랑하는 사람, 이런 것이 사랑이라고 몸으로 행동으로 가르쳐주는 사람이 지금의 남편이다. 지금 남편은 성당에서 전례부 복사단 간사로 봉사하고 있다.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면 가슴이 벅찰 정도로 하느님께 감사가 절로 나온다. 남들보다 가진 것이 없어도, 세상이 원하는 인재가 아니어도 나와 내 아이에게는 한 없이 소중한 사람이고 가족이다. 하느님이 아니시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성가정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 주시는 분이신 그분 말씀대로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시고 채워주시는 분,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되찾아 주시고 이방인을 사랑하시는 나의 주님, 내 머리털까지 새어 놓으시어 내가 힘들고 지칠 때 다시 일으키시는 분. 그래서 그분은 내게 있어 살아계심을 생생히 믿게 해 주시는 분이시다. 내가 세례를 받기까지 바로 올 수 있는 길을 돌아오게 하시는 분, 이기적이고 교만한 나를 사랑하시어 가던 길을 돌려 세우시는 분, 결혼의 실패로, 돌발성 난청으로 약자들의 심정을 알게 해 주신 분, 주님께서 내게 보내신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나는 당신이 얼마나 완벽하고 전능하신 분이신지 깨달았다. 딸아이를 통해 유치원 수녀님을 만나게 된 것도, 동촌성당에 스스로 발을 내딛게 해 주신 것도, 교리 선생님을 대모님으로 맺어 주신 것도, 남편을 만나게 된 것도 모두 그분의 계획이셨음을, 오늘의 내가 있도록 우연이 아니라 모든 것을 계획해 놓으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중 어느 것 하나 한 조각이라도 빠지거나 틀어졌다면 아마도 지금의 나는 없을 것이다.

 

이제 주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지 12년, 세례 받기 전의 나보다 조금 더 용서할 용기가 생긴 듯하다. 완벽하진 않지만 상대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세상을 향한 원망과 분노로 가득 찼던 마음 한구석이 눈 녹듯 사라지고 하루하루가 너무나 감사하고 행복하다.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변화해 가고 있는 것 같다. 아직도 부족하지만 이제야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세상의 가치로 따지며 제 혼자 잘난 줄 알고 살았던 내가 이제부터는 주님께서 나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을 이웃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꼭 물질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이웃을 위해 봉사하며 살 것이다. 그분을 뵈었을 때 그분 마음에 들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오늘도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언제 오실지 모르는 그분을 맞이할 준비가 된 하루를 살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