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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치유의 해’
다행이당


글 이영승 아우구스티노 신부 | 통합의료진흥원 전인병원 원목 담당

 

얼마 전 저는 감사하게도 현재 〈빛〉잡지에 글을 연재하고 계신 심탁 신부님을 비롯해 프랑스에서 활동 중이신 우리 교구 신부님들을 찾아뵐 기회가 있었습니다. 선교 사제로서, 학생 사제로서 살아가는 신부님들의 모습을 보면서 ‘하느님께서는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부르고 쓰시는구나.’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기회를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살아갈 힘을 주시는구나.’도 생각하게 되었지요. 우리말로 강론을 하는 것도, 공부를 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타국의 언어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학업을 한다는 것은 매순간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많은 순간들에서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일을 만나게 되고, 자기 뜻과는 다른 상황들을 적잖이 만나게 됩니다. 그런 순간들을 우리는 고통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상처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더더욱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께 기도하게 되는 건 아닐까요?

그 누가 병을 앓기를 청하고 그 누가 눈물만 흐르는 삶을 원하며 그 누가 막막하기만 한 인생을 바라겠습니까? 할 수만 있다면 건강하길 원하고 웃고 싶고 탄탄대로의 인생을 바라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또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죽지 못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우리 삶에 지금보다 더 나은 시간들이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희망이 바로 우리 신앙인의 삶입니다.

한 번씩 제가 근무하는 원목실 책상 앞에 앉아서 이렇게 혼잣말을 내뱉을 때가 있습니다. “다행이다.” 어제보다 밝아진 환자 분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어 다행이고, 재활의 의지를 가지고 오늘도 열심히 운동을 하시는 분들을 뵈서 다행이고, 아무런 의식이 없는 환자 곁에서 그래도 묵주알을 굴리는 보호자의 믿음이 병실을 채우고 있어서 다행인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매일매일 다행인 것들이 너무도 많은 곳입니다. 이곳 병원이라는 곳은 말이지요. 그리고 비록 우리 눈에는 좋지 않게 보이는 것들 안에서도 하느님께서는 더 나은 쪽으로 우리를 이끄시기에 그 또한 다행입니다, 천만다행입니다.

그래서일까요? 2019년 3월, 병원에 계신 분들을 위한 다양한 치유프로그램의 이름을 정하는 것은 그렇게 고민스럽지 않았습니다. 늘 혼잣말처럼 내뱉던 그 한마디 그것이 바로 치유 프로그램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함께 모여 복을 나누고 야기가 꽃피는 마, 다행이당. 어느덧 1년이란 시간이 흘렀고 다양한 프로그램이 환자 분들의 병원생활이 지루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하루하루를 채우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단 하루도 다행이지 않은 날이 없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이 치유 프로그램이 계속해서 더 많은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성장해 나가길 바랄 뿐입니다. 비록 슬펐던 하루였어도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오늘 내가 직접 색칠했던 장미꽃을 바라보며 ‘그래도 다행이당.’ 할 수 있길 바랐고 우울하고 누구와도 대화를 하고 싶지 않은 순간, 내 손으로 심은 다육이를 바라보며 ‘너에게라도 내 마음을 꺼내놓을 수 있어서 다행이당.’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완전하게 다 알지 못합니다. 입원하신 분들이 병원에서 정말로 하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이지요. 물론 가장 바라는 것은 회복과 완쾌, 그리고 퇴원이겠지만 그래도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 중에 잠시나마 쉴 수 있는 시간이 저희 병원의 ‘다행이당’ 치유프로그램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흔히들 젊은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표현처럼 ‘환우분들이 무엇을 좋아할지 몰라 다 준비해봤다.’는 마음으로 아주 많고 다양한 치유 프로그램을 운영 중입니다.

매일이 바쁩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다른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어 바쁩니다. 하지만 저는 늘 뭔가 더 필요한 것이 있지 않나 틈틈이 고민을 합니다. 여기 계시는 동안 정말 ‘아파서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에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게 해드리고 싶어서 말이지요.

그래서 하느님의 은총을 청합니다. 마치, 선교 사제가 외국어로 강론을 할 때에도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하듯이, 그리고 학생 사제가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공부를 할 때에도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하듯 저 역시도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낍니다.

현재 프랑스 벨포르교구에서 선교 중인 배재근(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은 저희 병원에서 오랜 시간 재활을 하고 이제는 충분히 일상생활이 가능해지실 정도로 건강을 회복하셨습니다. 그 배재근 신부님이 계신 곳에서 함께 주일 미사를 드렸을 때 느꼈던 마음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신부님께서 주일 미사를 봉헌하는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째서 하느님께서는 동양의 젊은 사제를 이역만리의 이 시골 마을까지 보내셨을까?’ 그 순간 열심히 신부님을 바라보는 신자들의 얼굴을 발견했습니다. 그때서야 깨달았지요. ‘아! 이분들의 기도의 힘이구나, 이분들의 기도가 이 동양 신부를 여기까지 불러왔구나!’

여러분, 기도의 힘은 이렇게도 놀랍고 대단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허투루 듣지 않으십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시는 여러분들도 짧게나마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지 않으시겠습니까?

지금도 병마와 싸우고 있는 많은 환자 분들이 오늘 하루 만큼은 ‘다행이당’ 하고 말할 수 있기를, 그리고 환자분들이 잠시라도 마음 편하게 병원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라는 저의 지향과 저희 전인병원의 미션을 하느님께서 지켜봐 주시고 은총을 내려주시기를 말입니다.

동양의 신부도 프랑스 시골 마을까지 기꺼이 보내주시는 하느님께서 지금 짧게나마 바친 여러분들의 기도도 꼭 들어주시리라 믿으며 저는 이만 글을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이 원고를 전송하고 나면 저는 또 감사의 기도와 함께 이렇게 혼잣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아, (원고를 마무리해서) 다행이당.” 여러분, 다행인 오늘 하루를 사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