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의 현장에서”는 천주교대구대교구 사회복지회에서 주최한 “2019년 대구카리타스, 우리들의 이야기” 공모전에서 수상한 사회복지사들의 수기를 한 편씩 소개해드립니다. - 편집자 주(註)
나는 행복하게도 가톨릭 신자인 부모님이 계셔서 어릴 때 세례를 받고 종교 안에서 자라면서 많은 활동을 했다. 그래서 대구가톨릭사회복지회에 취직했을 때 부모님과 서로 얼싸안고 진심으로 행복해했다. 그 마음을 항상 잊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상인종합사회복지관 사례관리팀 업무를 맡고 있던 나는 2017년 봄, 그동안 한번도 만나지 못했던 난민 가정을 접하게 되었다. 사회복지에 종사하고 있는 내게도 ‘난민’은 대중매체와 인터넷 여론으로만 접하던 생소한 존재였기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과의 첫 만남부터 현재까지의 여정을 소개하고자 한다.
모하마드는 가정을 이루고 시리아 락카 지방에서 살았는데 2011년 시리아 정부군과 반군 간의 내전이 발생하면서 수니파와 시아파 종파 간의 갈등, 미국과 러시아 등 강대국의 개입으로 시리아는 유엔에서도 사실상 무정부 상태라고 선언하게 된다. 이에 생존의 위협을 느낀 모하마드 가족은 긴 여정 끝에 한국에 입국하게 되었다. 그들의 고향인 락카 지역은 IS단체의 수도가 되었으며 여전히 시리아 내전은 진행 중이다.
모하마드 가족은 기대와 희망을 안고 한국에 입국했지만 난민신청이 인정되지 않아 인도적 체류허가 비자를 발급받고서야 한국에 정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비자로는 정식취업이 불가능해서 모하마드는 어디든지 찾아가서 일을 했다. 하지만 필요한 만큼의 돈은 벌기 힘들었고 그만큼 그의 근심 걱정도 늘어갔다. 기본적인 의식주가 가능하기만을 바랄 뿐이었지만 희망보다는 절망에 가까운 생활이 이어졌다. 여섯 명의 식구를 거느리는 가장으로서 자신이 경험한 절망을 자녀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지만 일할 곳이 부족해 가난했고, 의료나 교육 등 전반적인 사회보장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 결국 모하마드는 가까운 이웃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관공서를 통해 우리 복지관으로 연계되면서 인연이 시작됐다. 그렇게 2년의 시간 동안 모하마드 가족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일용직으로 일하는 모하마드는 거주지에는 일자리가 부족해 타 지역까지 가는 일이 많았다. 가장으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묵묵히 일하는 남편에게 한없이 미안하고 고마운 아내 미엘은 남편이 걱정하지 않도록 가사를 돌보고 싶지만 아홉 살 나르샤, 여섯 살 리앙, 다섯 살 자이브, 세 살 마할, 그리고 곧 태어날 아기까지 다섯 명의 자녀를 키우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가족들은 모두 아랍어를 사용하며 이슬람 문화 영향으로 매일 다섯 번의 예배를 드린다. 라마단 기간에는 철저히 금식을 지키고 금육을 한다. 여성은 히잡을 두르고 노출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하마드는 종교에 대해서도 한국문화와 벽을 좁히고 이 사회에 정착하기 위해 변화하며 적응하고 있다.
모하마드 가족은 정착에 꼭 필요한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집에서 공부할 수 있는 교재를 준비해서 많이 쓰는 말을 가르치고 종종 TV를 함께 보면서 한국어로 대화하고, 자원봉사자와 함께하는 언어학습을 지원했다. 그래서 지금은 한국어와 약간의 몸짓으로 간단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됐다.
처음 만났을 때 일곱 살이던 나르샤는 이제 아홉 살이 되어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다. 간단한 대화만 가능하던 나르샤가 지금은 긴 이야기도 가능할 만큼 이해력과 표현력이 풍부해졌고 자기감정도 잘 표현한다. 사실 이주민인 나르샤는 학교 시설장에게 승인을 얻어야 입학이 가능했는데 다행히 관할 행정복지센터와 초등학교의 도움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나르샤의 초등학교 입학식에 나는 보호자 자격으로 나르샤의 손을 잡고 모하마드의 가족과 함께 참석했다. 그날 모하마드의 자녀들은 누구보다 많은 시선을 받았지만 걱정과는 달리 대부분 따뜻하고 관심어린 눈빛이었다. 나르샤의 반 친구들과 학부모들은 먼저 다가와 인사하고 배려하며 존중해 주었다. 차별을 걱정했던 나의 우려가 무색할 만큼 나르샤는 잘 적응해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 나르샤가 성인이 되어 초등학교 때의 기억이 좋은 추억으로 채워지길 진심으로 바란다.
나르샤의 어린 동생인 리앙, 자이브, 마할은 어린이집에 다니게 되었다. 물론 어린이집 입학에는 아이들의 영유아 예방접종과 건강검진, 입학서류를 제출해야 했고, 마할은 외국인 등록증을 발급받지 못해서 구청에서 입학승인을 받아야 했다. 아이들의 예방접종을 위해 보건소를 자주 드나들다보니 당시 미혼이던 내가 아이들의 아버지라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싫지 않았다. 처음에는 낯을 가리던 아이들도 이제는 내 손을 허물없이 잡거나 안기기도 한다. 세 아이는 어린이집에 다니면서 급속도로 말이 늘어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정도만 하던 아이들이 지금은 문장으로 된 일상대화가 가능해졌고, “선생님, 오늘은 책을 읽었어요.”라는 표현도 웃으며 하게 됐다. 이렇게 몇 개월
만에 눈에 띄게 빠르게 성장하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나는 우리 법인에서 하는 이 일과 내 직업에 대한 강한 책임감과 사명감을 느낀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돕는 것이 내가 할 일이고 업무지만 그 과정에서 스스로에게 강한 동기부여가 되었기 때문이다.
모하마드의 자녀들 모두 초등학교와 어린이집에 입학했지만 여전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기본적인 것들에 대한 참여가 어려웠다. 모하마드 가족을 처음 만나던 날 엄마 미엘의 뱃속에서 인사를 나눈 마할이 태어나던 날부터 지금까지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는 내게 마할은 조금은 더 각별한 아이다. 마할의 출생신고를 위해 모하마드와 함께 출입국 관리사무소를 방문했던 날이 기억난다. 간단한 신고만 하면 될 줄 알고 기다린 우리에게 담당자는 출생신고와 비자발급은 여권이 없으면 불가능하고 여권 발급은 재외공관에 가야 가능하다고 했다. 시리아 재외공관은 우리나라에는 없고 중국이나 일본에 있는데 탈출자 신분인 그들에게는 너무 위험한 일이다. 결국 마할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산부인과에서 받은 출생증명서뿐이었다. 아이는 존재하지만 법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무국적자인 셈이다. 최소한의 보장도 받지 못한 채 불안한 삶을 살아가게 될 아이의 미래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그 후로도 여러 방안을 고심해보았으나 마할은 지금까지도 무국적자로 살고 있다.
2년 동안 모두의 관심과 도움으로 모하마드 가족은 우리나라에서 잘 적응하고 있지만 내게는 결코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난민에 대한 각종 자료를 찾아보고 그들이 처한 현실과 종교와 문화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현실적인 문제로 아이들의 기저귀, 분유, 옷과 신발, 학용품 등 필요한 물건이 많아서 후원금을 마련해야 했다. 집 근처의 어린이집에 보내기 위해 다섯 곳 이상을 연락하고 찾아가고 상담했지만 그때마다 자리가 없거나 입학이 어렵다는 답변에 좌절하던 지난날들….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아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들고 지쳤을 때 가장 가깝게 지내는 팀원과 동료들이 나를 격려하고 응원해주었다. 그런 관심과 도움이 내가 사회복지 현장에서 근무할 수 있는 원동력과 에너지가 되기에 우리 법인 직원 식구들에게 감사하고 고맙다. 그래서 나도 힘든 동료를 이해하고 공감하고 위로하며 힘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내게는 이렇게 의지하고 함께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지만 가족의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이며 한국까지 찾아온 모하마드의 삶은 그렇지 못하다. 내전으로 집은 폐허가 되고 총성이 계속되는 가운데 가족과 친구가 죽어가는 광경을 직접 지켜봐야 했던 모하마드의 참혹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함께하는 동안 조금은 이해하게 되면서 내 일상 안에서의 소소한 행복에 감사하게 됐다.
살고자 탈출했고 살고자 한국에 온 그들의 삶에 관심이 없었고 알지 못했던 것이 너무 미안했다. 내가 사회복지사로 근무하지 않았다면, 이웃의 관심이 없었다면 모하마드와 나의 인연은 시작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웃의 작은 관심과 사랑 실천이 모하마드 가족처럼 어려운 이들에게 등불이 되어 그들의 삶을 변화시켜주었다.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복음 말씀처럼 살아간다면 세상의 빛은 더욱 밝아지고 마땅히 누릴 수 있
는 권리를 모두 공평하게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 그러므로 모하마드 가족도 인간 존엄성과 인권을 존중받을 권리가 있고 내가 모하마드 가족의 삶의 한 부분에 속한 것도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다.
그 사랑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나누고 그들이 웃음을 되찾을 때 나는 내가 하는 일에 대해 강한 자부심과 자긍심을 느끼게 된다. 그들과의 소중한 인연은 나를 성장시키고 성숙하게 한다. 간절히 바라던 대구가톨릭사회복지회 법인 안에서 즐거움, 감동과 보람을 느끼며 가슴이 뛰는 일을 한다는 것은 나에게는 행운이며 행복이다. 그래서 가톨릭과 함께 사회복지사로서 나의 신앙과 가치관을 실천하고 있고, 모든 이들에게 가난과 소외가 없는 희망을 전하기 위해 오늘도 나는 희망의 바람을 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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