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들른 건 아주 우연이거나 뜻밖이었다. 고향 산소길을 다녀오느라 저녁 때도 지난 제법 어둑할 무렵, 내가 사는 공소(公所)에 거의 닿을 쯤이었다. 그때 차를 세웠다. 그곳이 화산(花山)에서 십여 리 떨어진 신녕(新寧) 시장 입구였는데, 우선 전부터 드나들던 ‘시장 식육식당’에 들어가 늦은 요기를 할 셈이었다. 주차를 시장 안 공터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차문을 열고 내려서는 즈음 한 간판이 언뜻 눈에 띄었다. 그걸 잠시 쳐다보다가 나는 막 어떤 환희를, 탄성을 느끼고 부르짖을 뻔했다.
‘번지 없는 주막’! 그건 옛 시절 시골극장의 간판이 아니던가. 그 솜씨없는 간판 그림이람! 그래도 김진규인지 최무룡인지가 여주인공 최은희를 은근히 마주 바라보는 것이 알아볼 만했다. 향수, 그것도 참 희미하고도 야릇한 옛날 고향 읍내의 기억으로 그런 걸 알아낼 수 있는 것이다.
그 그림 옆쪽엔 좀 작긴 하지만, 또 예고편 화면도 한 컷 그려져 있어서 다음 번 영화도 보러 오라는 초대까지 잊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간판 그림 한가운데 별로 크지 않게 ‘장터 국밥집’이란 상호가 씌어져 있었지만, 그건 오히려 부수적인 부록 격(格)이라고나 할까, 그런 것이다.
“저기 들어가자! 국밥이든 곰탕을 먹든지, ‘눈물없이 볼 수 없는’ 인생유전의 명화를 보든지 하여간에...” 나는 그날 저녁에 더 이상 맛이 좋을 수 없는 소머리 곰탕국밥을 먹었다. 내가 늘 애용해 마지않는 ‘맑고 깨끗하므로 위대하기 짝이 없다.’는 소주도 한 병 곁들여 마셨다. 괜찮은 만찬이었다.
그 후 나는 그 국밥집에 몇 번 더 들렸다. 밥 사 먹으러 갈 일이 더러 생기는 것이다. 파출부 아줌마 - 실은 60대 후반의 동네 할머니 - 가 성당 반모임에 가거나 텃밭 일로 바빠서 끼니를 해 주지 못할 땐 외식으로 식사해결을 해야 하니까. 그러다가 그만 단골이 되어버린 것이다. ‘번지 없는 주막’의, 우리 읍내 유일한 극장의 상영작은 역시 국밥 한 그릇과 소주 한 병일 뿐인데 말이다. 그 국밥집에 드나들면서 내가 보고 들은 얘길 한 두어 토막을 여기 써 본다.
하루는 점심밥을 먹으러 갔는데, 그 집 아줌마의 아들이 으슥한 뒷방에 있는 모양이었다.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아, 빨리 도(다오). 벌써 5분 지났다. 뭐 하노?” 아마 초등학교 점심시간에 점심을 먹으러 집에 온 것인 듯했다. “야가 와 이리 깝치쌓노?”(*국어사전을 찾아봐도 ‘깝치다’는 말은 없다. 경상도 방언으로 ‘매우 바쁘게 졸라대다’라는 뜻일까.) “좀, 조금만 기다리거래이. 그라고 니는 밥 묵는 거보다 공부나 잘 해라카이.” 그 엄마의 대답이 이랬다. 그 말 쓰임새가 화가 난 게 아니라, 아들이 참 존귀(?)하다는 듯이 그 음성이 짜장 은근하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그 아들이 말없이 잠잠해졌던 것이다. 아마 어린 아들 녀석이 “밥 달라.”는 짜증을 낸 게 아니라, 가까이 있는 엄마라도 그냥 불러 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또 하루 점심 때였다. 이곳 농부인가 싶은 사람 둘이 미리 와 있었다. 벌써 소주 두 병이 바닥나고 세 병째 술이 돌고 있었다. 한 사내가 말했다. “그래두 내사 양파 농살 못 베리누마. 돈 안 된다 캐도. 그래, ‘티끌 모아 태산’이라 안 캤능교. 물론 다른 거도 심고 해야지만…” 다른 사내가 좀 급한듯이 대꾸했다. “이젠 술 고만 무라, 몌 병째고? 그래, 그래. 농살 짓긴 지야지, 우짜겠노?”
나는 그네들 사정과 사연을 다 안다. 나는 아예 농사를 할 줄도, 농부로 살 줄도 모른다. 그래도 농촌을 좀 아는 셈이다. 농촌성당 생활을 다섯 해 한데다 지금 여기 화산(花山)에 안식년으로 한 해 넘게 거처하며 살다보니, 요사이 수년내 농업이 어떠한가를 얼추 짐작하고 헤아려 알게도 되는 것이다. 어쨌든, 그 사내는 동료의 만류로 소주 두 병 반을 먹곤 친구 - 친구의 우정 - 에게 이끌려 나갔다. 나도 그분과 한 잔 할낀데… 나중에 나는 그렇게 후회막심이었다.
나는 때때로 지팡이를 짚고 다닌다. 오른쪽 다리 대퇴골이 삭아내려 고쳤고, 등골 척추 5번이 튕겨나가 수술했기에 운신하기가 어려울 땐 그럭하고 다니는 것이다. 하루는 지팡이를 잃어버렸다. 자동차에서 내려 잠깐 볼 일을 본 뒤 다시 차를 타고 돌아온 것일까. 그러느라 지팡일 버려두고 온 걸 잊었을까. 여기저기 몇 군데 생각나는 대로 찾아나섰다.
그러다 또 며칠 후 국밥집, 아니 ‘번지 없는 주막집’에 가니까 아줌마가 “지팽일 두고 갔데예. 집<번지>을 몰라서 찾아가 줄 수도 없었어예.”라는 것이다. 나는 지팡일 짚고서, 어떨 땐 지팡이도 없이 그곳 향수어린 - 어쩌면 근심어린 - 주막집엘 가끔 들릴 것이다.
황혼녘, 시장터엔 사람 왕래도 드물고 쓸쓸한 공기만 어둠에 젖어올 때, 나는 ‘장터 국밥집’의 삐걱이는 의자에 가 앉아있을 것이다. 영화 - 간판 - 도 보고 혼자 객술도 한 잔 할 것이다. 이 겨울이 더욱 깊어가는 날, ‘사랑’을 저마다 멀리 떠나보내고, ‘사는 일’일랑 밤바람에 홀로 애달파질 터이다.
살아 생전 문패도 번짓수도 나에겐 없다. 설령 있다 해도 언젠가는 떠나고 사라져가야 할 이 인생살이에 그게 얼마나 잠깐일까.
어쩌다 장터의 국밥집에, 주막같은 이승집에 잠시 쉬어가는 것과 무어 다르랴. 아아, 요즘 세상의 겨울바람이 이리도 차갑고, 여기 머물다 갈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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