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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치유의 해’
일상이 일상일 수 있게


글 이영승 아우구스티노 신부 | 통합의료진흥원 전인병원 원목 담당

 

얼마 전 커피를 마시다가 금방 꺼내 입은 옷에 흘려버렸습니다. 왜일까요? 마스크를 끼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 저도 모르게 그만 커피를 입으로 가져가다가 입을 가로 막은 마스크 덕분에(?) 커피를 쏟아 버린 것이죠. 매일같이 마스크를 착용한 것이 그리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원내에서는 하루 종일 마스크를 착용하다 보니 순간 내가 마스크를 하고 있다는 사실도 깜빡했던 탓입니다. 얼른 옷을 닦아서 얼룩지지는 않았지만 진한 커피의 향은 하루 종일 저와 함께였습니다.

우리의 일상이 바뀌어 버렸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옆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손을 맞잡고, 등을 토닥이며 포옹을 하는 것도 이제는 쉽사리 할 수 없게 되었고, 그 흔한 악수조차 잠시 고민을 해야 하는 일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사람들의 마음속에 미움과 분노가 차오르고, 실시간으로 전해지는 뉴스들은 그런 우리들의 마음을 더 부추기고 있습니다. 가장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하루’가 이제는 되찾고 싶은 ‘무언가’가 되어버리고 있습니다.

저는 병원에 있으면서 제일 많이 말씀드리는 것이 바로 마음건강입니다. 아무리 좋은 치료를 받고 아무리 좋은 약을 먹어도 내 마음이 건강하지 않으면 그 치료도 약도 나에게는 의미가 없다고, 그렇게 말씀드리지요.

그런데 지금은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마음 아파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저조차도 그렇습니다. 괜히 누군가를 탓해보기도 하고 누군가를 욕하면서 사람이 어떻게 사람에게 그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분노도 표출하곤 합니다. 제 마음을 제가 아프게 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답답하고 억울할 때 ‘속이 상한다.’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 말은 맞는 말입니다. 마음이 건강하지 않으면 우리의 속은 점점 상해갑니다. 속이 상하니까 우리는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아 내 속을 확인하고 약해진 부분은 회복시키고, 건강한 부분은 잘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우리 교구뿐만 아니라 한국천주교회가 236년 만에 미사를 중단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무엇을 준비하고 계시기에 우리의 평범하고 당연했던 일상을 이렇게 송두리째 바꾸어 놓으신 것일까?’ 분명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것이 있으시겠지만 우리는 늘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에 한두 걸음 늦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런 물음들은 저와 가장 가까이 있는 분들, 곧 우리 병원에 계신 환우 분들이 자주 생각하시는 물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치도 않았던 병을 앓게 되고 이유도 모른 채 이 시련을 겪어야만 했던 분들, 모든 것을 시간 싸움이라 여기며 하루하루를 살아가시는 분들 말이지요.

그런데 과연 이러한 물음들은 그분들만의 것일까요? 우리도 때때로 그렇게 하느님께 여쭙고 있지는 않은지요. 이유도 모를 고통을 받았을 때요. 원치도 않는 상처를 받았을 때요.

저는 지금의 이 시간들이 그런 ‘이유 모를’, ‘원치도 않는’ 시간들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사실 아무도 지금처럼 우리의 일상이 이렇게 변하길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 누구도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의 하루는 예전과는 너무도 달라져 버렸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언제까지 이 상황이 이어질지 가늠도 안 됩니다.

그럼에도 지금 제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지키는 일입니다. 이것은 지금이어서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일생 동안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지금 마음 상태는 어떠한가요? 며칠 전 저의 마음처럼 누군가에 대한 분노와 미움으로 가득하신가요? 아니면 지금 저의 마음처럼 주변을 둘러보려는 마음이신가요? 지금 제가 어떤 상황이냐고요?

저는 병원이라는 특수한 공간 안에서 이 안에 있는 모든 구성원들을 위해, 여느 때와 다름없이 출퇴근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았지요. 그런데 아주 놀라운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의 대부분은 지금이어서 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이미 계속 해왔던 것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미사를 봉헌하고(비록 원장 신부님과 둘이지만) 병원 이곳저곳을 다니며 직원들에게 인사를 나누고, 심지어 함께 봉헌하는 미사가 중지된 탓에 병실에서 예수님의 몸을 모시길 청하는 환우 분들에게 봉성체를 하는 것!

이것은 지금이어서 할 수 있게 된 것들이 아닌, 늘 매일 같이 반복되는 저의 삶이었습니다. 늘 당연하게 해왔던 것들이었지요.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재발견되었을 뿐, 늘 제가 하는 것이었고 또 앞으로도 제가 계속해서 하게 될 일들입니다. 너무 신기하지 않으신가요? 내가 늘 하고 있던 것들의 의미를 이렇게라도 다시 깨달을 수 있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모든 것이 바뀌었다고 생각했지만 바뀌지 않은 것들도 있음을 이렇게 생각해 보니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바뀌지 않은 것들은 여러분들의 삶에도, 우리 신앙인들의 삶에도 분명히 존재할 것입니다. 가족들과 나누는 평범한 대화와 하느님과 나만의 깊은 대화 등등. 시대가 바뀌어도, 상황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우리들의 소중한 것들은 분명히 존재하기 마련이지요.

지금은 그런 것들을 재발견하는 시간으로 삼으면 어떨까 조심스레 제안 드려봅니다. 막연하게 미움과 분노로 나를 채워서 내 속을 상하게 하지 마시고, 그동안 발견하지 못했던 나의 소중

한 소명들을 되찾는 그런 시간으로 이 시기를 보내시길 권해드립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 하느님께 청을 드리자면, 이러한 일상의 재발견도 좋지만 우리의 일상이 다시금 일상일 수 있게 당신의 은총을 내려주십사고 청해봅니다. 평범했던 일상이 건조해져 버리고, 따뜻했던 만남들이 더 이상 삭막해지지 않을 수 있도록 말이지요. 순간순간 전해지는 뉴스와 소식들에 일희일비하지 않을 수 있도록 말이지요.

인생에 늘 맑은 날만을 바랄 순 없지만 지금 닥친 이 비바람으로 우리의 일상이 더 이상 흔들리지 않기를, 이 정도의 비바람으로 우리의 삶이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를 함께 기도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상의 재발견이 아닐까 싶습니다.

부디,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하루빨리 우리의 일상이 일상일 수 있길 바라봅니다. 마스크가 아닌 웃는 얼굴로 너와 내가 다시 가까워질 수 있는 그런 일상을 우리는 반드시 되찾게 될 것입니다. 꼭 그럴 것입니다. 저의 이 뚝심이 여러분에게도 전해져 여러분들이 마음 건강도 잘 챙기시길 기도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