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선교사’. 나에게도 아주 낯선 명칭이었다. 교구에서 연락이 오기 전까지….
교구의 연락을 받고 그때서야 자비의 선교사가 무엇인지 찾아보았다. 2016년 자비의 특별 희년 때에 교황님의 권고로 전 세계에 1,000여 명의 ‘자비의 선교사’가 임명되었고, 사도좌에 유보된 죄까지 사해주는 특별 권한을 갖고 하느님 자비의 증거자로서 파견되었다. 세계적으로 좋은 반향을 일으키면서 교황님은 ‘자비의 선교사’를 더 모집하라고 세계 교회에 권고하셨고, 그 영향으로 보잘것없는 나까지 자비의 선교사가 되었다.
‘자비의 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하느님의 자비를 어떻게 세상에 전할 것인가?’라는 보편적인 물음이 아니라 ‘내가 정말 자비로운가?’라는 자기 성찰의 물음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자비로운지 아닌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저 사제로서의 삶에 충실하려 했고 신자들에게 따뜻하게 다가가려 했다. 어느 정도 자비로운 삶을 살았지 않았을까 생각했지만 자신을 돌아볼수록 그렇지 않은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자비롭지도 않은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의 자비를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들었다. 그러다 ‘나부터 우선 자비로운 사람이 되자.’라는 결심으로 자비의 선교자로서의 삶을 시작하였다.
자비롭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많은 이유들을 아우르는 하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그것은 ‘받아들임’이었다. 어떠한 사람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바탕이 되어야 자비로울 수 있게 된다.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에서는 자비로움이 생기지 않는다. 마음이 불편하고 맞지 않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자비로운 마음으로 대할 수 있겠는가?
자비로우신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겨 본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9) 온유함은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마음이고, 겸손함은 어원(Humilitas: 大地)에서 보듯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대지와 같은 마음이다.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인 것이다. 예수님은 세관장 자캐오를 편견 없이 소중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받아들였고, 이로 인해 자캐오는 재산의 반을 내놓을 정도로 변화되었다. 이렇게 받아들임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다. 예수님의 받아들이는 마음은 많은 이들을 감동시키고 변화시켰다.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은 이렇게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바탕에서 시작된다.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 이 마음이 자비로운 마음이다.
‘받아들임’. 참 쉬운 듯하지만 어렵다. 각자 성향이 있고 취향이 있는데 어떻게 다 받아들일 수 있을까? 자기에게 잘못한 이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자기와 맞지 않는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자기에게 피해만 주고 남에게 해악을 끼치는 이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참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하느님은 나에게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부르신다. 자비의 선교사라는 직무 이전에 먼저 자비로이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이라고 부르신다.
쉽지는 않지만 주님이 부르시기에 응답하려 한다. 작은 것부터 하나씩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억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그렇게 받아들이다보면 내 마음이 어느새 예수님의 자비롭고 사랑스런 마음을 닮아가겠지.
‘자비의 선교사’의 삶은 내가 먼저 자비로운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진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부족하지만 주님의 자비를 조금이나마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생각을 하니 ‘자비의 선교사’가 나에게 큰 은총임을 깨닫는다. 이 직무가 나를 조금이나마 성화시켜 나가게 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기에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던 이 직무가 이제는 소중하게 여겨진다.
* 서보효(라이문도) 신부님은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대신학원 영성 담당으로 신학생들을 가르치고 영적 지도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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