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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이야기
욥의 위로자들


글 허찬욱 도미니코 신부 |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구약의 욥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욥은 견디기 힘든 불행을 겪습니다. 모든 재산을 잃고, 사랑하는 자식들도 모두 죽고 맙니다. 욥의 몸은 온통 발진으로 뒤덮여, 욥은 질그릇 조각으로 종일 제 몸을 긁습니다. 잿더미 위에 앉아 욥은 절규합니다. ‘하느님, 제가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합니까.’ 욥은 자신이 태어난 날도 저주합니다. 소식을 들은 세 명의 친구들은 욥을 ‘위안하고 위로하기로’(욥 2,11) 마음먹고 욥을 찾아갑니다. 그들은 욥에게 고통의 의미에 대해 긴 설명을 늘어놓습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하느님은 공정하시니 죄 없는 자를 벌하진 않으신다. 네가 받는 고통은 바로 너의 죄 때문이다. 네가 스스로 의롭다고는 하나, 하느님께 죄를 지었음이 틀림없다.’ 욥은 그들에게 입을 다물라고 꾸짖습니다. “아. 자네들이 제발 입을 다문다면! 그것이 자네들에게 지혜로운 처사가 되련마는.”(욥 13,5) 욥은 친구들에게 따져 묻습니다. 자네들은 나를 위로하러 온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의 편을 들어 그분을 변론하”러 온 것인가?(욥 13,8 참조) 욥의 절규는 사그라들지 않습니다. 친구들과의 격론을 통해 오히려 더 날카로워집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얼굴을 감추십니까? 어찌하여 저를 당신의 원수로 여기십니까?”(욥 13,24)

 

욥의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러 왔지만, 욥을 위로하는 데에 실패했습니다. 그들이 한 것은 위로가 아니라 설명이었기 때문이지요. 그 설명이라는 것도 모든 재난을 하느님의 징벌로 보는 투박한 인과론이었으니, 욥이 그 설명에 화를 낸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위로하러 온 이들이 오히려 욥을 힘들게 합니다. 욥은 친구들에게 말합니다. “자네들은 모두 쓸모없는 위로자들이구려. 그 공허한 말에는 끝도 없는가?”(욥 16,2-3) 오죽하면 ‘욥의 위로자들’(Job’s comforters)이라는 표현이 있겠습니까? 욥의 위로자, 겉으로는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위로하려는 것처럼 보이나, 결과적으로는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이 글을 읽으실 때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좀 가라앉았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 글을 2월 말에 씁니다. 대구지역 내 감염이 늘어나고, 하루에도 백 명 넘는 확진자 수가 보고되는 시점입니다. 불안이 증폭되는 이 시기, 최근 몇몇 목회자들이 코로나 바이러스를 하느님의 징벌로 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경남 창원의 한 목사는 자신의 설교에서 ‘교회를 탄압한 중국 정부를 하나님이 괘씸하게 여기셔서, 중국에 바이러스를 내리셨다’고 주장했습니다. 대구에 있는 유명교회의 한 목사도 비슷한 말을 합니다. “중국교회 지도자 하나가 기독교를 말살하는 정책을 만듦으로 인해서 지금 중국에 저렇게 전염병이 창궐하고 사람이 죽어나간다”라고요. 대전의 한 목회자도 “전염병은 범죄한 백성들과 그 시대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단언합니다. 서울에 있는 한 목사도 ‘전염병은 영적이고 신앙적인 시각에서 보면 분명한 하나님의 징벌이며, 이를 하나님의 징벌로 보지 않는 시각이야말로 세속주의적이고 인본주의적 사고’라고 주장합니다. 설교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명할 필요는 없고, 그들의 주장만 요약하겠습니다. ‘하나님은 공정하시니 죄 없는 자는 절대 벌하지 않으신다. 누군가 고통을 받는다면 그것은 바로 그들의 죄 때문이다.’ 눈치채셨는지요? 예. 그렇습니다. ‘욥의 위로자’들이지요. 위로가 아니라, 오히려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사람들.

 

선한 하느님이 선한 의지로 만드신 이 세상에 악과 고통은 왜 존재하는가? 이 질문은 풀기 힘든 난제입니다. 이에 대해 지금까지 많은 대답이 나왔지만, 그 대답들이 고통받는 이들을 실제로 위로하지는 못했습니다. 고통이 하느님의 징벌이라는 것도 전통적인 대답 중 하나인데, 이 해석은 사실 인간에게도, 그리고 하느님께도 그리 좋은 해석은 아닙니다. 고통이 하느님의 징벌이라면, 그렇지 않아도 고통에 허덕이며 힘들어하는 사람이 죄인이라는 굴레까지 쓰게 됩니다. 아픈 이에게 고작 한다는 말이 ‘너는 아픈 사람이니, 동시에 나쁜 사람이다’인 것인데, 이 얼마나 몹쓸 말입니까? 하느님께도 결코 좋은 해석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훈육하기 위해서 거침없이 재난을 내리시는 하느님의 표상이 과연 하느님께 맞는 것일까요? 하느님이 과연 그런 하느님이실까요?

 

홍수이건 지진이건, 아니면 이번처럼 전염병이든 간에 어떤 재난이 닥쳤을 때, 우리의 시선은 우선 고통받는 이를 향해야 합니다. 왜 이런 고통을 받게 되었는지를 차갑게 설명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따뜻한 마음으로 물어야 합니다. 고통받는 이에게 필요한 것은 투박한 설명이 아니라 섬세한 위로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폴리꾀르(Paul Ricoeur, 1913-2005)는 악(惡)의 문제를 다루는 자신의 강연에서, 악의 문제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이론적으로 해명하는 것은 늘 실패해왔다고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악의 실체에 대해서는 알 수 없겠지만, 우리가 “악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 이를 실제로 실천하는 용기, 그리고 악에 희생당한 사람들과 공감하려는 노력이야말로 전적으로 하느님께 속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요.* 이 재난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 하느님은 끝끝내 침묵하실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재난으로 고통받는 이와 공감하려는 노력 안에 하느님께서 계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전염병을 하느님의 징벌이라고 단언하는 이들에게 묻습니다. 아래를 내려다보며 하는 고압적인 설명, 그리고 눈을 맞추며 다가가는 세심한 위로, 이 둘 중에 무엇이 더 영적이고 신앙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슬픈 마음으로 욥의 말을 돌려드립니다. “자네들은 모두 쓸모없는 위로자들이구려. 그 공허한 말에는 끝도 없는가?”(욥 16,2-3)

 

* 악(惡) - 철학과 신학에 대한 하나의 도전, P.리꾀르/박영범, 83-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