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이 노랑과 빨강으로 짧은 대화를 나누고 금빛 노을이 겸손하게 속삭이는 계절, “선교사례”란 글이 보물 창고를 연상케한다.
나는 1999년 7월에 스스로 대봉성당을 찾아가서 세례를 받았다. 예비신자교리를 받을 때 미사에 참례하면 하얀 미사포를 쓴 자매님들이 전례에 따라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모습이 너무나 부러웠다. ‘나도 머지않아 미사포를 쓰고 저 자리에 앉을 날이 오겠지.’ 하며 기다리던 세례식 날, 드디어 신자가 되었다는 기쁨으로 바로 레지오에 입단해서 선교를 시작했다. 나의 제1호 선교대상은 남편이었고 이어서 아들, 며느리, 그리고 사돈까지 차례로 세례를 받았다.
‘사람 낚는 어부’, 어렵다는 그 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호스피스 봉사를 시작한 나는 천주성삼병원에서 칠곡 경북대학교병원까지 가는 중에 성당에서 미사를 참례하고 환자의 집을 방문한다. 가정 호스피스는 선교하기에 아주 좋은 못자리였다. 비신자들이 많았고 냉담교우도 가끔씩 섞여 있었다. 나는 이 가족들을 놓치지 않고 이름과 세례명을 적어 와서 나만의 선교대상 명단에 올려놓고 아침기도 때에 꼭 봉헌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 호스피스 봉사를 그만두게 된 어느 날, 그동안 내가 선교한 세례자, 대세자, 개종자 수를 세어보니 28명이었다. 예전에 평화방송에서 어느 신부님께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선교 한 명에 10점으로 계산해서 200점이 되어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그 순간 ‘나는 천국에 무사히 들어가고도 80점이 남는구나.’ 싶어서 웃음이 나왔다.
나는 대학병원에서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환자들 대부분이 신자인 그곳에서 우리의 할 일은 신문과 책자 전달, 기도 등으로 다소 간단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냉담교우가 너무 많았고 그 모습에 ‘여기서도 내가 할 일이 있구나.’ 하고 생각한 나는 이번에도 이름과 세례명을 적어 와서 결과는 하느님께 맡기기로 하고 그들을 기억하며 기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병실을 방문하다가 한 형제를 만났다. 덥수룩한 머리에 휠체어를 타고 이리저리 다니는 모습이 병원생활에 꽤 익숙한 사람으로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서 신문을 건네며 성당에 나올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쉽게 그러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원목실 수녀님께 허락을 받고 자원봉사가 끝난 뒤 한 시간씩 1대 1로 교리공부를 하기로 했다. 난들 무슨 교리 지식이 풍부해서 남을 가르칠 수 있으랴. 그래도 함께 공부한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41세의 김○○ 형제는 산업체에서 일을 하다 기계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어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았는데 주변에 가족이나 친지는 아무도 없다고 했다. 대학병원에서는 더 이상 치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며 김○○ 형제에게 퇴원을 권유했고 가까운 병원으로 옮겨 입원생활을 시작한 그를 따라 나는 계속 교리를 가르쳤다. 김○○ 형제는 산재에서 받을 수 있는 보상을 이미 다 받은 터라 어느 병원에서도 오래 머물 수 없어서 마지막으로 퇴원하기 전에 수녀님과 상의를 해서 프란치스코 성인 축일인 10월 4일에 대세를 받았다.
갈 곳 없는 그를 위해 2~3평 남짓한 고시텔을 얻어 짐을 옮겼다. 휠체어를 타야 하는 환자들은 병원에서 나오면 이동 시에 무조건 택시를 타야 하는 등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던 즈음 대봉성당에서 세례식이 있다고 했다. 나는 김 프란치스코를 보례자로 등록했고 그는 예비신자들과 함께 한 달간 교리를 받았다. 다행히 혼자서도 성당에 잘 다니고 적응하는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됐다. 드디어 세례식 날, 가슴에 ‘보례자’란 명찰과 꽃을 달고 대부를 선 우리 남편이 그의 휠체어를 밀며 성당으로 들어오는 모습은 보기 드문 세례식 장면이었다.
여기까지가 내가 할 일인 줄 알았는데 김 프란치스코 형제는 병마와 싸우면서 자주 쓰러져 입원했고 그때마다 병원비로 인해 경제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그동안 여기저기서 도움을 받아왔지만 일정한 수입이 없는 김 프란치스코 형제가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됐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가톨릭사회복지회에 전화해서 김 프란치스코 형제의 사정을 얘기 했더니 본당사회복지위원장님과 연계해서 도움 받을 수 있도록 친절히 길을 열어주셨다. 그렇게 〈빛〉 잡지 ‘함께 사는 세상’에 김 프란치스코 형제의 사연이 소개되어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김 프란치스코 형제가 교적을 다른 성당으로 옮기겠다고 했다. 무슨 이유인지 자세한 이야기도 듣지 못한 채 그렇게 인사를 나눈 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막막한 현실 앞에서도 잘 살아보려고 세례도 받고 견진도 받았는데 그렇게 가 버리고 나니 좀 더 잘해 주지 못한 것 같아 후회되고 허탈하기도 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미 프란치스코의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잘 알고 계셨기에 편히 쉴 수 있는 자리로 바꾸어 주신 것 같았다.
이 땅에는 행복하고 축복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더 큰 은총이라는 사람도 많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 주시는 분은 하느님 한 분뿐,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김 프란치스코 형제님, 다시는 아프지 말고 우리 천국에서 만날 때는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오늘도 묵주를 손에 들고 성당을 향해 대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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