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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몬시뇰의 세상이야기
물따라 세월따라(3)


김영환(베네딕도) 몬시뇰

짧았지만 한티에서 보낸 나의 유년기의 글은 끝을 맺을 날이 다가왔다. 다섯 살 무렵 우리 가족은 만주로 이사하게 되었다. 이로써 나의 만주생활이 시작되었다. 당시 아버지께서는 큰외삼촌(어머니의 큰오빠)에게서 간곡한 편지를 받았다. 큰외삼촌의 성함은 정순주, 독립운동가였다. 그 당시 일본은 조선사람들을 만주로 이주시키기 시작했다.

대륙에 진출하기 위해 이미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만족치 못하고, 조선사람들을 완전히 말살시킬 일환으로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구호 아래 창씨개명을 강제로 단행했다. 그때의 조선은 나라 없는 설움에 보호받을 곳도 없고 억울해도 호소할 곳도 없었다. 이런 때 외삼촌은 나라를 위해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독립운동가로 나섰고, 한일합방 이후 항일운동을 계속하다가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동지들은 삼삼오오 만주로, 상해로, 미국으로 흩어졌는데, 외삼촌은 만주에 정착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때 우리 나라의 독립도 중요하였지만, 그보다 먼저 조선사람이 하느님을 알고, 신앙에 눈을 뜨는 것이 더 급하다고 믿었기에 중국 상해로 가자는 동지들의 권유를 마다할 수밖에 없었고, 조금이라도 조선과 가까운 곳에 있는 만주에서 조선사람들과의 접촉을 하려 했던 것이다. 지리적으로 조선과 가까운 만주는 왕래는 물론 자금 조달 방법이 다른 나라에 비해 비교적 쉬웠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신앙을 전파하고자 했으나, 함께 신앙을 전파할 손이 모자랐기에, 믿을 만한 이를 찾던 중 아버지가 생각났다고 한다. 아버지는 외삼촌으로부터 그곳 사정을 전해 듣고, 고조 할아버지 때부터 신앙때문에 박해를 받아 한티로 피난 와 살았던 것을 생각하시고는 ‘신앙을 지켜내고 전파하는 일’이 당신 ‘평생의 일’이라 여기시고 기꺼이 외삼촌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하셨다.

 

아버지께서 먼저 외삼촌을 따라 가신 곳이 그 때 주소로 ‘만주국 해륜현 해북진’이었다. 그곳은 개간되지 않은 땅이 많아서 조선사람들이 농사짓기에는 조건이 좋았다. 외삼촌은 조선에 있던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만주로 온 후, 흩어진 조선사람들을 모아 어마어마한 농장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당시 해북진에는 30∼40호씩 조선사람들이 모여 살던 촌락이 9개나 되었다. 그곳에는 조선사람들이 어림잡아 1,500∼2,000명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북진을 택한 이유는 이미 1900년대 초엽부터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님들이 그곳에 와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기에 쉽게 정착할 수 있었다.

 

외삼촌과 아버지는 해북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선목촌(善牧村)이라는 조선인 촌락을 만들었다. 선목촌에는 곧 신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외삼촌과 아버지의 계획은 인근 모든 마을 사람들을 전부 신자화 한다는 것으로 우선 그곳에 성당을 세우기로 했다. 아버지는 조선에 가서 교섭을 하여 한국인 신부를 초빙해 왔다. 서울교구의 ‘김선영(金善永)’ 신부였다. 김 신부는 만주에 와서 바로 본당을 맡아 신자교육과 예비자교육 등을 시작하였다.

 

아버지는 문맹자를 없애기 위해 야간학교를 만들었고 또한 조선사람들이 모여 산다 해도 중국어를 모르면 생활하기 어렵기 때문에 신경(新京), 지금의 장춘(長春)교구에 허락을 받아 중국인 보좌신부 왕 신부도 모셔 왔다. 어머니는 동네 부인들을 모아 한문을 가르쳤고 성당에서는 성모회를 조직하여 신앙강좌도 시작하였다.

 

그곳은 북만주라 겨울 추위가 영하 30도를 오르내렸고 최저 40∼50도까지 내려갈 때도 있었다. 영하 10도만 되어도 아이들은 따뜻하다고 집 밖에 나와 놀 정도였다. 그렇게 만주에서 1∼2년을 지냈다. 그곳에는 학교가 아예 없었기에 학교에 다니는 아이도 없었다. 아버지는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학교를 세우기로 마음먹고, 조선에 가서 ‘이원근(李元根)’ 선생님과 ‘양 마리아’라는 여선생님 두 분을 모셔 왔다. 이원근 선생은 대구 사람이었고, 양 마리아 선생은 평양 사람으로 동생이 신경교구 신부였다.

 

그 두 분이 1학년부터 6학년 전체 학생을 가르치게 되었다. 물론 중국어는 왕 신부가 맡았다. 학교라야 흙담에 초가집이었지만, 학교로써 갖추어야 할 것은 대충 갖추었었다. 두 선생님이 전 학년을 맡다 보니, 두 학년에 각각 수업을 들어가게 되면 나머지 네 학년은 예습, 복습을 하거나 때로는 놀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나도 그때 ‘조선인 선목소학교(善牧小學校)’라는 간판이 붙은 바로 그 초라한 흙담 초가 학교에 1학년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다가 4학년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아이들이 이런 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해도 될지, 아니면 조선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할지를 걱정하셨다. 당시 작은 외삼촌도 만주에 와서 우리와 함께 살았기 때문에, 내 나이 또래의 그 집 아이들도 나와 같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가족회의가 열렸고, 가족 중 누군가가 서울에 가서 살면서 아이들을 맡아 학교에 보내기로 했다. 1학년에서 4학년까지 만주에서 사는 동안 어릴 적 뛰놀던 한티라는 곳은 까마득하게 잊고만 살았다. 한티에서 그저 산과 산, 나무와 바위밖에 못 보던 나로서는 만주라는 전혀 다른 곳에서의 삶이 그야말로 새롭기만 한 또 다른 경험이었다.

 

만주는 사방팔방 어디를 보아도 지평선 밖에 보이지 않았다. 지평선 끝에서 무지무지하게 큰 붉은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고, 저녁이면 아름다운 노을과 함께 저 멀리서 지는 석양을 바라보기도 했다. 집에서 나가면 종일 뙤약볕에서 놀아야 했다. 나무라고는 볼 수가 없으니, 그늘이 있을 리 없다. 동네 아이들과 그저 하늘과 땅 사이에서 뛰놀았던 것이다. 밀밭에서 종달새가 지저귀고, 허허벌판에는 온갖 꽃들이 피고, 여름 한낮에는 뒷포자(강보다 작고 도랑보다 훨씬 큰)에 가서 멱도 감고, 낚시질도 하고…. 가을이 되면 아이인 우리들로서는 별로 할 일이 없었다. 산이 없으니 등산이니 단풍놀이니 소풍도 있을 수 없었고, 오로지 학교 마당에서 자치기, 딱지치기, 공차기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토요일에는 교리공부, 성가연습을 했고 주일이면 온 동네에 축제분위기가 감돌았다. 왜냐하면 주일만 되면 인근 마을에서 많은 신자들이 성당에 모여들었고, 주일 미사 후 점심 때 많은 신자들이 우리집으로 와서 점심을 먹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우리집은 인산인해였다. 아이들은 그 틈에 밀려 자칫하면 점심밥을 저녁에 얻어먹기 일쑤였다. 우리집은 한 채로는 모자라 집 세 채를 한 집으로 개조하여 살았다. 식구도 많았지만,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니집이 커야 했던 모양이다.

 

만주의 가을은 짧은 것에 비해 겨울은 길었다. 6월이나 되어야 모심기가 가능하고 7, 8월이 지나 9월이 되면 추수를 빨리 끝내야 했다. 9월이면 눈이 내리기 때문에, 조금도 기다릴 시간이 없다. 추워졌다 싶으면 영하 30도, 모든 것이 얼어붙고 한번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3, 4월이 되어서야 땅을 밟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은 참으로 신기하기만 하다. 그 짧은 기간 동안 벼를 다 익게 하다니 말이다. 한국에서는 훨씬 오랜 기간이 지나야 이삭이 여무는데, 한국의 볍씨를 만주에 가져다가 심어도 신기하게 알아서 단기간에 추수를 하게 된다. 오묘한 주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지 않은가!

 

이런 생활 속에서 세월을 따라 인생의 흐름을 타고 나는 조금씩 성장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