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금 『빛』 5월호의 여는 글을 쓰고 있지만, 이 글을 쓰는 날은 4월 초입니다. 여러분이 이 글을 보시는 5월에는 코로나19로 인한 상황이 더 나아지기를, 좋은 소식이 가득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현대 사회는 과학 문명의 발달과 의료 기술의 발전으로 과거 어느 때보다 인간의 삶이 편하고 윤택해졌습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바이러스는 엄청나게 빠른 전염력으로 병을 전파하며 이런 인간의 문명을 비웃는 듯 합니다.
전염성을 가진 병들을 흔히 전염병(傳染病) 또는 염병(染病)이라고 하고, 과거에는 돌림병을 역병(疫病)이라고도 했습니다. 질병에 대한 지식이 없던 옛날에는 돌림병을 모두 역신(疫神)이 하는 나쁜 짓으로 여겼기 때문이지요. 위생 관념이 철저하지 않던 탓에 홍수라도 나면 먹을 것이 부족해서 면역력이 떨어지고, 오염된 물로 인해서 병균이 퍼져 전염병이 돌았습니다. 흔히 염병이라고 하면 장티푸스를 일컫는데, 옛날에는 가장 끔찍한 돌림병이었습니다. 온역(瘟疫)이라고도 하는 장티푸스는 전염력이 강해서 한 사람만 걸려도 순식간에 온 마을에 퍼져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고 합니다. 고열과 설사에 시달리다 결국 손도 제대로 써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열이 많이 나서 온역(溫疫)이라고도 했고, 전염력이 너무 강해 옮긴다는 뜻의 염(染)자를 써서 ‘염병(染病)’이라고 불렀습니다. 흔히 욕설로 많이 쓰이는 ‘이런 염병할’, ‘염병하네~’ 같은 말에는 바로 장티푸스에 걸려 죽을 놈이라는 고약한 뜻이 담겨 있지요. 원인도 모르는 염병이 사람들 사이에 퍼지면서 불안과 공포는 엄청났을 겁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전염병이 심술궂고 고약한 역신(疫神)의 짓이라고 여기기도 하고, 하느님이 내리신 무서운 벌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신라 제49대 헌강왕 때 동해용왕의 아들인 처용(處容)이 왕을 도와 정사에 공을 세웠습니다. 그러자 왕은 그에게 아름다운 아내를 맞게 해 주고 벼슬도 내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내가 너무 아름다워 역신(疫神)이 흠모하여 사람의 모습을 하고는 그의 집에 들어가 몰래 아내와 잤다고 합니다. 밤중에 돌아와 그 모습을 본 처용은 오히려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면서 나왔다고 합니다.
“서울 밝은 달에, 밤늦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 것이지만, 둘은 누구의 것인고? 본디 내 것(아내)이지만, 빼앗긴 것은 어찌하리오?”1)
그러자 역신은 처용의 대범한 성품과 초탈한 경지에 놀라, 처용 앞에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었습니다. 그러고는 처용의 얼굴이 그려진 곳에는 절대로 나타나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 후 역병이 돌면 사람들은 처용의 얼굴을 그려 대문 앞에 붙였는데, 그러면 그 집에는 전염병이 들어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마 이런 설화는 당시 사람들이 전염병을 극복하기 위해 애쓴 처절하고 간절한 마음의 반영이겠지요.
이제 조심스레 ‘코로나19’ 이후를 생각해 봅니다.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전염병에 각국은 문을 닫고 자국민에게만 초점을 맞추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지구상에는 깨끗한 물이 없고 비누마저 구하기 어려운 빈민국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사실상 할 수 없는 수용소의 난민들과 빈민가 사람들도 있지요. 전염병보다 무서운 전쟁의 위험을 피해 떠도는 난민들도 있고, 의료 기술이 낙후해 확진자를 선별하는 것마저 포기한 나라도 있습니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도움의 사각지대에 있는 소외된 계층들이 많습니다. 전염병보다 굶주림이 더 무서워 오늘도 폐지를 주우러 나가는 분들이 계시고,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에 소외된 사람들은 정보에도 취약하고 신앙생활마저도 소외된 경우가 많습니다.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찾아와 우리의 생활을 위협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우리 사회에 무엇이 필요한지, 우리가 무엇을 놓치며 살고 있는지 돌아보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이번 코로나19 사태로 드러난 ‘신천지 예수교증거장막성전’의 문제점을 널리 알리고, 신천지에 빠졌다가 다시 교회로 돌아오는 이들을 어떻게 사랑으로 맞아들일 것인지도 교구와 본당에서 논의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젊은이가 무엇에 목말라하며, 기성 교회는 왜 그들의 갈증을 채워 주지 못했는지도 돌아보고 진지하게 고민하며 고쳐 나가야 하겠습니다.
염병은 언제나 우리를 찾아올 수 있고, 우리는 그런 전염병에 너무 불안해하거나 공포에 휩싸여 판단력을 잃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가짜뉴스에 빠지지 않고 정부 당국과 의료진을 믿고 침착하게 대응해 나간다면 우리는 전염병의 위기를 잘 이겨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처용이 보여 준 대범한 마음가짐으로 소중한 우리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1) 『삼국유사』, 권2, 「처용랑망해사조(處容郞望海寺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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