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브레히트의 서정
독일의 시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는 나치 독일의 폭력을 목도한 후, 이렇게 씁니다. “나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악행에 대한 침묵을 의미하여 거의 범죄처럼 취급받는 이 시대는 도대체 어떤 시대란 말이냐!”(「후손들에게」 중) 가공할 폭력이 일상적으로 자행되는 시대에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노래하고 서정시에 취하는 것이 얼마나 호사스럽고 무책임하게 보일 수 있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브레히트는 서정이 사라지는 시대를 개탄합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폭력의 시대에 필요한 언어는 폭력을 직접 고발하는 언어뿐이라고요. 오직 그런 언어만이 유효한 언어라고요.
2. 아이히만의 관청언어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주도했던 사람 중에 아이히만(Adolf Eichmann, 1906-1962)이라는 독일군 장교가 있습니다. 아이히만은 독일의 패전 후에 신분을 바꾸고 아르헨티나에서 숨어 살았지만, 곧 이스라엘 비밀경찰에게 체포되어 예루살렘 법정에 서게 됩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그 재판의 과정을 기록으로 남깁니다. 그 기록이 바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법정진술을 들으면서, 무엇보다 그의 언어사용에 놀랍니다. 한나 아렌트가 놀란 것은 아이히만이 사용하는 말의 지독한 상투성이었습니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속한 조직의 상투적 표현에 기대지 않고서는 한 마디, 한 구절도 자신의 표현으로 말할 수 없었습니다. 아이히만 자신도 법정에서 오직 ‘관청용어만이 나의 언어’라고 스스럼없이 말합니다. 한나 아렌트는 이 언어의 상투성이 성찰의 부재로 이어진다고 지적합니다. “그의 말을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말하는 것의 무능력은 그의 생각의 무능력,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데의 무능력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집니다.”(『예루살렘의 아이히만』, 106) 상투적인 언어로밖에 자신을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은 표현방법이 없다는 것을 넘어, 표현할 자신의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아이히만은 주어진 생각을 주어진 방식으로 반복할 뿐이었습니다. 주어진 생각을 주어진 방식으로 반복하는 사람에게 성찰을 기대하기는 힘듭니다. 성찰은 주어진 대상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다른 언어로 해석하고 표현하려 노력하는 이에게나 가능한 일이니까요. 언어의 부재는 성찰의 부재로 이어지고, 성찰의 부재는 죄책감 없는 폭력을 낳습니다.
3. 언어의 황무지
획일화된 언어만 있는 황무지에서 폭력은 자라납니다. 언어의 관점에서 본다면, 폭력의 고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다양한 언어를 회복해야 합니다. 폭력이 있다고, 오직 폭력에 대한 담론만 허용되는 시대는 더욱 강퍅해집니다. 더욱 폭력적이 됩니다. 브레히트가 토로하듯 ‘나무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악행에 대해 침묵하는 것’이 아닙니다. 엄혹한 시대일수록, 오히려 더 자주 나무에 대해 말해야 합니다. 나무에 대해, 숲에 대해, 그리고 계절에 따라 피고 지는 꽃에 대해, 아이들의 환한 웃음에 대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애틋함과 그리움에 대해, 사랑과 희망에 대해 우리는 더 자주자주 말해야 합니다. 다양한 대상에 대한 작은 이야기들이 많아져야, 거대담론이 무너지고 독단의 언어가 힘을 잃습니다. 가장 빈번히 사용되는 언어가 가장 강력한 언어이지요. 권력의 언어가 강력한 것은 자주 말해지기 때문입니다. 전횡을 일삼는 권력을 견제하고 싶다면, 권력자들이 쓰는 언어가 아니라 권력과는 상관없는 언어로 세계를 자주 해석하고 표현해야 합니다.
4. 다양한 작은 이야기
선거가 있었던 4월은 정치언어가 다른 언어들을 압도하던 시기였습니다. 사람들은 아군과 적군으로 갈라선 후, 자신이 속한 진영의 언어를 반복했지요. 자기확신은 강해지고 공감능력은 약해졌습니다. 우리들의 언어는 더 획일화되고, 또 표독스러워졌지요. 선거과정에서 쏟아낸 우리의 말들 중에 상투적이지 않은 말을 우리는 몇 마디나 찾을 수 있을까요. 주어진 것에 대해 주어진 방식으로 반복하는 것에서, 우리는 과연 성찰의 언어를 찾을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우리는 이 봄에도 봄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요. 봄에 피는 꽃에 대해, 사람 사이의 작은 떨림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런 것들에 대해 말하면 안이한 서정이 될까요? 우리가 정치행위를 통해 애써 도달해야 할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명징한 정치적 구호가 획일적으로 관철되는 세계가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의 작은 이야기들이 서로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는 사회일 것이라고, 저는 자주 생각합니다. 오직 획일적인 정치언어만 남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반정치적인 현상이겠지요. 우리에게는 이 세계를 채워나갈 다양한 언어들이 있고,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아무도 우리에게 한 가지 이야기만을 강요할 순 없습니다. 다채로이 피고 지는 꽃들처럼, 다양한 작은 이야기들이 함께 피어나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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