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중국 우한의 어느 연구원에 의한 중국발 코로나바이러스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속으로 대한민국을 걱정하면서도, 선교사로서 저는 프랑스의 안녕을 위해 기도드렸습니다. 저의 새로운 부임지 오베르네는 알자스 지방에서 손꼽는 유명 관광지 중 하나입니다. 중국 관광객들이 많은 이곳도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우리도 사목 차원에서 본당과 사무실에 손소독제와 직원들을 위한 마스크 등을 준비하자고 주임신부와 본당 직원들에게 제안하였습니다. 이에 주임신부는 농담으로 받아넘기며, “두려워하지 마라, 그저 믿기만 하여라.”라고 말하고, 제의방을 돕는 자매 한 분은 “너무 과장하지마라.”고 했습니다. 먼 나라 이야기로만 듣는 듯했습니다.
평일미사 중에 자주 프랑스를 위해 기도하며 서로 조심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우리 중 한 사람만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려도 우리 모두가 미사를 못하게 될 것이라 말했습니다. 다들 ‘설마!’, ‘무슨 그런 말을….’이라는 표정들이었습니다. 미사 후 신심대표 할머니는 “나는 두렵지 않다.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이니….” 라고 했습니다. 얼마 후 이탈리아 감염 소식이 전해지더니 급기야 알자스에서도 환자들이 발생했습니다. 오베르네 북쪽으로 30분 거리의 스트라스부르에서도, 특히 남쪽으로 한 시간 거리의 뮬루즈에서 2,000여 명의 개신교 집회에서 집단감염 사태가 발생했다는 뉴스가 나왔습니다. 어느 날 미사 후 할머니 한 분이 다가와서 “우리 한국을 위해서도 기도하자.”고 제안하셨습니다.
2020년 3월 첫 금요일 성시간과 고해성사
성시간 주례는 종신부제가 맡고, 저는 고해성사를 담당합니다. 성당은 겨울뿐 아니라 봄, 가을도 춥습니다. 그래서 난방이 되는 제의방에서 성시간을 거행하기로 하고 저는 성당 제단 위 감실 앞에 고해소를 차립니다. 보통 20~30명 참석해 평균 10명이 고해성사를 봅니다. 꽃가루와 먼지 알러지로 인해 코와 목이 평소 저의 약점입니다. 바이러스의 주요 침투 경로 역시 코와 목이라니 개인적으로 마스크를 끼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아 주님의 보호를 청하며 다소 추위와 불편을 보속으로 봉헌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참고로 여기 고해성사는 면담하듯이 얼굴을 마주 보면서 합니다.
바로 그 경건하고 긴장된 고해성사 시간 초반, 고해 대기자들을 무시하고 어느 거구의 남자가 무어라 중얼거리며 제단을 지나 감실 앞에 차려둔 고해소의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점령군 같은 그에게 “순서를 지켜주시죠?”라고 말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입에서 무슨 약물냄새와 묘한 체취를 풍기는 그 남자가 큰 소리로 “네가 여기 신부냐?”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얼른 말을 삼키고, 성호경으로 그를 맞이하는 축복기도를 했습니다. “이런 거 필요 없고….”, “…?”, “너네 하느님은 어디 있냐? 세상이 왜 이 모양이냐? 뭐하냐? 완전 묵시록이다. 알마게톤 마귀의 힘은 너무 세다. 세상을 봐라! 네 하느님이 있으면 어찌 이렇게 무기력하냐? 말해봐!”, “…?”, “너 한국 사람이지?”, “…예….”, “그것 봐. 한국에 지금 무슨 일이 있는데 넌 지금 여기서 뭐하냐?”(제가 코로나를 가져 왔다는 뜻인지?) 고해신부로서 경건한 마음 집중은 아랑곳없이 사라지고 난데없는 기습공격에 깜짝 놀라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사실 마음 준비라는 것이 피상적인 준비일 뿐 내적 무방비 상태였음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며 기도 분위기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그로 인해 불쾌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나 성체 앞에서 흠숭기도를 하는 신자들과 고해 준비 참회자들의 진지한 몰입을 방해하지 않으려면 우선 제가 흔들리면 안 될 일이었습니다. 저는 “여기 준비된 예식에 순서가 있으니 우리 이야기는 약속을 잡아서 따로 길게 이야기합시다.”하고 제안하며 그의 전화번호를 받아 적었습니다. 그는 “연락줄 거지?”라고 말하며 솥뚜껑만 한 왼손을 저의 오른쪽 어깨에 얹으며 지긋이 내리눌렀습니다. 위압감을 느낄 만큼 저를 내려다보며 경멸과 무슨 고뇌의 눈빛으로 쏘아 보았습니다. 아, 눈 싸움? 순간 저의 파충류 본능(생존투쟁본능)이 불쑥 삐져나왔지만 즉시 수습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그 눈빛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씩씩거리고 중얼거리며 뭔가 신성모독이라도 할 것 같았던 ‘드니(디오니시오)’, 분명 ‘저를 도와주십시오!’라는 너무나 두려운 내면의 부르짖음이었다고 봅니다. 반면 저에게 던져진 무비유환!(에페 6,10-20: 영적무장)
사실 그로 인한 충격이 가시지 않은 채 다음 고해자들을 맞아들였지만 그들의 말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습니다. 위기였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그분들의 평소 영성과 신앙의 중심 주제들을 되새김질하면서 겨우겨우 말씀을 나누며 대화를 이어나갔습니다. 그런데 위의 장면을 목격한 고해자들이 저를 직·간접적으로 위로하고 존재감과 용기를 불어넣어 줍니다. 영적인 사막 여정을 치열하게 투쟁하며 걷는 이분들의 개별적인 신앙, 그들의 기도와 신심생활 안에서 우리 서로를 도우며 깊어가는 우정, 서로의 존재감과 소중함을 확인해 주는 그런 ‘성사적 대화’ 안에서 말입니다.
확실히 성시간을 통해 드러난 저의 내적 준비는 허약하고 부실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급히 주님의 말씀 안에서 답을 찾습니다.
1) 묵시록 12-21장 : 뇌와 가슴을 뚫고 나오는 말씀. 지금의 상황을 영적 전쟁 상태로 진단케 하고, 어린 양과 어머니와 대천사들의 편에 서서 악의 세력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영적 의탁, 영적 힘과 용기를 줍니다. ‘허허… 천지창조 이래 세상종말까지, 세상은 항상 붉은 용이 포효하고 여인과 아드님을 대적하는 영적 전쟁 상황이거늘, 이 전쟁터에 군인 혹은 무사(선교사)가 주님의 말씀과 영으로 무장도 하지 않은 채 전장에 있었다니…. 그랬으니 한 영혼의 목마른 외침에 놀랄 수밖에!’ 2) 저 자신을 위한 말씀의 에너지. 게으르고 무기력한 건성 기도로는 영적 근육이 안 생길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 6장 25-34절, 특히 33-34절. 로마서 12장 9-21절, 로마서 13장 8-4절, 로마서 8장 전체. 야고보서 3장 13-18절. 3)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야고보 사도의 한 말씀. “순수 인간적인 지혜는 세속적, 현세적일 뿐 아니라, 악마적인 것이다.” (야고 3,15)
제 마음대로 새겨 봅니다. “주님의 말씀과 영으로 무장하고 반복훈련으로 단련하지 않은 신앙생활은 열매가 있을 수 없고 위기상황에 무기력하다. 또 말씀과 영으로 무장하지 않은 채 순수하게 인간적이라는 것은, 창조주 하느님이 아닌 세상과 타협하고 또 자신의 욕망과 게으름과 태만으로 스스로를 영적 무장해제 시킴으로써, 항상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악마의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다.”(1베드 5,8-9) 돌아보면 이런 과오들과 약점이 크게 보입니다.
이야기 하나
삼십년 전 알베르 까뮈의 불어 소설 『라 페스트』를 초급 불어 시절에 어렵게 대충 읽은 기억이 납니다. 전염병 앞에서 기도에 집중하는 본당 신부와 환자 살리기에 헌신적이 의사 리유. 지금 기억에 이 존경스러운 의사의 실존주의는 본당 신부의 신앙을 비웃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치유면에서는 무능하나 영혼의 치유와 안식에 꼭 필요했던 신부의 영적 존재감과 노력이 너무 무시되는 것 같은 인상이 남아 있습니다. 그 둘의 조화가 더욱 이상적이었을 텐데요.
이야기 둘
- 문화적으로 이곳에서 마스크를 착용한다는 것은 “저는 악성 전염병 환자요.”라고 자인하는 셈입니다. 그래서 한동안 일회용 마스크가 있어도 사용하지 못했지만 요즘은 일회용 마스크를 찜기에 소독해서 재활용하고 있습니다. 마침 벗들이 돕고자 소식을 전해 옵니다.
- 선거를 앞둔 한국은 코로나 대응에 승기를 잡은 것처럼 방송에 나옵니다만 여기는 초기로 진단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국가와 주교회의와 교구 차원에서 일반적으로 통행금지령, 일체 집회금지령이 내려졌습니다. 통행증을 지참해야만 최소한의 필요한 움직임이 가능합니다.
- 본당 성가대원과 매일 미사에 참례하던 할머니 한 분도 확진 중환자가 되어 있습니다. 이제야 주임신부가 긴장을 합니다. 일대일로 저에게 구두 유언을 남깁니다. “내가 죽거든 지하에 있는 포도주 다 너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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