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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용서와 화해의 해’ 선교신앙수기 공모 장려상 ②
하느님께 의지하고 살다보니 저절로 선교가 되었습니다


글 임경숙 아녜스 | 봉곡성당

영어교사였던 나는 남편의 암 발병으로 직장생활과 간병을 동시에 하기 버거워 2012년 8월 말, 27년 6개월 동안 다니던 교직을 그만두고 12년째 간병을 하고 있다. 2019년에는 1월에 결혼 30주년, 2월에 시아버지 사망, 6월에 아들 관면혼배와 시어머니 세례, 8월에 아들 결혼식 등 내 생애 굵직한 일이 많았다. 지난 일들을 되돌아보는 것은 힘들었던 것들을 되새김질하는 것 같아 피하고 싶지만 내게 다가올 시간을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는 것으로 채우고 싶지 않아, 또 이제 과거는 지나간 일로 두고 하루하루를 주님 안에서 기쁘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서 하나하나 고해성사하듯 지난 삶을 성찰하며 스스로 치유하는 과정을 거치고자 이 글을 쓴다.

나는 처음 성당에 나갈 때부터 결혼할 때까지 신부님들로부터 많은 사람이 결혼하자마자 시댁 핑계를 대며 성당에 나오지 않는다고 “결혼 적령기에 있는 젊은 여성이 세례 받겠다고 하면 가장 싫으니 혹시 세례 달라고 떼쓰지 마라.”, 먹을 때 성호를 긋지 않는다고 “신앙은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 생활이다.”, 그리고 관면혼배를 위한 면담에서 “신자와 결혼해도 시부모가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으면 신앙생활하기 어려운데 아예 신자 아닌 사람과 결혼할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말들이 섭섭했고, 오히려 신자 아닌 사람과 살면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 그 사람이 전교될 수도 있는데 그렇게 질책하는 신부님이 야속해서 펑펑 울며 모든 과정을 거쳤지만 살아보니 신부님들의 말씀이 다 옳았다.

수도생활을 동경하며 독신생활을 꿈꾸던 나는 알지 못할 심경의 변화로 갑작스레 결혼을 하였다. 결혼 전에는 시댁이 결혼한 손위 시누와 미혼인 시동생만 있는 단출한 집인 줄 알았으나 가서 보니 8년째 중풍으로 누워 계시는 시조부, 시조모, 시부모, 막내 시삼촌의 애기와 시누이의 어린 두 딸, 한 동네에 사는 시아버지의 육남매 동생들 가족이 수시로 함께하는 대가족이었다.

시집살이는 참 매서웠다. 나는 며느리의 권유로 신을 받은 시할머니의 이기적 욕심, 결혼하여 가정을 이룬 동생들을 심리적으로 독립시키지 못해 수시로 불러 부모님과 함께 지내는 것을 효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시아버지의 배타적 혈족사랑, 부모·형제·자매가 부당한 것을 요구해도 무조건 참고 그들의 뜻대로 해주는 것을 우애로 생각하는 시어머니의 삶의 방식과 시시때때로 드나들며 사사건건 간섭하는 시삼촌과 시고모들의 비상식적이고 불합리한 행태를 견디기 힘들었지만 묵묵히 참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변화될 것이라 믿고 성당에 가는 것도 나중으로 미루고 그들 울타리로 들어가 한 식구가 되고자 밖에서 돈까지 벌어오며 불평도 해서는 안 되는 전천후 무급파출부로 애쓰며 살았다. 그러나 말두면 종두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인지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점점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매사에 미신적인 행위를 하도록 강요하는 그들에게 휘둘리거나 화를 내며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 때때로 가야 할 날에 시댁에 가지 않는 것으로 저항하고 침묵하며 살았다. 그러한 탓에 심한 스트레스와 앎과 삶의 부조화로 마음이 먼저 병들어 갔고, 시작부터 따뜻함보다는 질시로 내몰리며 몸이 함께 병들어가는 줄도 모른 채 내게 요구되는 역할을 수행하느라 모든 인지기관이 고장났다. 브레이크 없이 달리는 차 마냥 내리막길을 질주하고 있던 삶을 변화시키고자 때때로 냉담을 접고 성당에 다녔지만 시집살이를 경험하지 않은 신부님이 주시는 고해성사와 내 가정사정도 모르면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성당 구성원들의 조언에 걸려 넘어져 냉담을 반복하였다.

그러던 중 아들이 고3이던 2008년 여름에 남편이 다발성골수종양을 진단받았다. 그 무섭다는 암이 우리 집에도 찾아왔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그 전해 대림시기부터 갑작스런 심경 변화로 세 번째로 냉담을 풀고 세례 받고 20년 만에 처음으로 제대로 주일을 지키며 성당을 꼬박꼬박 다니고 있었다. 방학이면 평일미사에 흠뻑 젖어지내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던 터라 확진 받은 그날은 앞으로의 삶이 두려워 처절하게 울었지만 이내 마음의 평정을 되찾아 모든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여러 가능성을 함께 얘기하는 의사의 말에서 부정적인 것만 듣고 치료를 거부하는 남편을 아무런 사전 지식이나 정보 없이 민간요법으로 보살피다보니 또다시 심신이 쇠진하고 우울해져갔다. 고통은 한꺼번에 온다더니 남편은 결국 병세가 깊어지고 면역력이 떨어져 설사만 반복하는 바람에 기약 없는 입원 치료에 의지하게 되었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 다니던 아들은 학과와 서울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계속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으며, 시부모는 자식들이 부모가 걱정할까봐 암 진단 받은 것을 숨긴 탓에 병으로 점점 뼈가 약해져 걸어 다니기도 힘든 아들에게 ‘벌초하러 가라, 고향에 자신들이 묻힐 땅을 측량하러 가라, 2층 주택에 오르내리기가 힘드니 집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해 달라, 편리한 아파트를 사내라.’는 등 끊임없이 보채는 바람에 나는 장기간에 걸친 과도한 스트레스와 과로, 극심한 공포감으로 공황장애를 겪게 되었다.

하느님은 한쪽 문을 닫으면 다른 문을 열어 두신다더니, 그동안 남편은 평소 내가 십자가를 걸어놓으면 어느새 다른 곳에 치우기를 반복하고 내가 반모임에 가면 “천주교 환자들 모임에 가냐?”며 빈정거렸는데 죽음의 공포 앞에서는 신에게 의지하고 싶었는지 진단 받던 그 해에 세례를 받았다. 유아세례만 했던 아들은 대학교 후배의 손에 이끌려 6개월 동안 꼬박 교리를 받고 첫영성체를 했다. 교사와 간병을 동시에 할 수 없어 퇴직하고 간병에만 몰두하던 나는 성당에서 관계를 형성하고 신앙생활에 적응하며 뿌리내리는 것이 만만치 않았지만 레지오를 통해 묵주기도를 하고, 신부님 권유로 제대회원이 되어 미사 준비를 하고 수녀님이 오신 후부터는 미사 해설과 독서에도 참여했다. 교우들과 서로 자기 방식을 고집하는 갈등으로 미워하고 잘못을 회개하는 것을 되풀이하는 중에도 내게 맞는 영성생활을 찾아갔다.

삶은 롤러코스터다. 남편의 병도 치료가 되어 상황이 좀 나아진다 싶으면 어느새 재발되는 것을 수차례 반복하다보니, 나는 뒤치다꺼리에 지쳐 마치 늪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칠수록 더욱더 깊이 빠져드는 것과 같은 공포감과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려서 병 진단만 안 받았지 암환자보다 더 나약한 상태가 되었다.

다발성골수종양이 재발과 치료가 반복되는 질병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세 번째 재발로 혈액자가이식치료가 결정된 후 나는 둘 중 누가 죽기 전에는 간병이 끝나지 않는다는 처참한 현실에 질려 쓰러져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마치 산꼭대기까지 바위를 힘들여 올려놓으면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다시 올려놓으면 또 떨어지는 것을 반복하는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무한 반복되는 고통에 대한 처절한 절망감으로 죽는 것이 차라리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죽고 싶었지만 그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내가 죽으면 아들은 암환자인 아빠와 우울증으로 자살한 엄마의 굴레를 쓰고 평생 고통스럽게 살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이전의 힘든 상황에서 공황장애를 털고 일어났듯이 남편 간병이 아들에게로 대물림된다는 몸서리치는 현실 앞에서 억지로라도 나 자신을 다시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내가 살기 위해 환자 중심의 간병을 그만두고, 음식을 만들어도 간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의 건강을 위해 만드는 것이며, 주변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남이라도 나눠줄 텐데 한집에 사는 사람이 아프니 진심으로 아낌없이 베풀고 나 자신이 내 삶의 주인이 되어 나를 사랑하며 기쁘게 살자고 끊임없이 되뇌며 모든 것을 바꾸어 나가기로 결심했다. 십년 넘게 간병하며 살아 온 삶의 방식과 사고방식이 쉽게 바뀌지는 않았지만, ‘내 삶의 주인은 나이고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해야 남도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라고 끊임없이 세뇌한 결과, 1년 후에는 그 생각이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남편도 처음에는 섭섭해서 불평하다가 내가 기력이 없어 며칠씩 일어나지 못하고 드러눕기를 반복하는 것을 보더니 웬만한 것은 스스로 해결하게 되었고, 집에 혼자 있으면 스스로 해먹어야 하는 남편 걱정을 하지 않고 가끔 자유롭게 외출해서 사람들과 점심도 먹고 또 남매들 집에 가서 2~3일 쉬고 올 수도 있게 되었다. 그리고 직장에 다니느라 시간 여유가 없고 체력이 부족해서 못했던 그림 그리기, 우쿨렐레 연주, 실버라인 댄스 배우기에 도전하며 지속적으로 나 자신을 단련하자 극심한 우울증으로 나약해졌던 심신이 회복되고, 힘든 일이 너무 많아 웃는 표정이라도 지으면 좋은 일이 생길까봐 일부러 입에 펜을 물며 웃던 것이 습관이 되어 자면서도 나도 모르게 입을 옆으로 벌려 웃던 의도된 미소가 어린 시절 늘 웃던 자연스런 미소로 되돌아왔다.

오랜 시간 지속된 남달랐던 시집살이, 보람 있었지만 힘겨웠던 교직생활과 반복되는 간병생활이 너무 고통스러워 누가 다시 해보겠느냐고 묻는다면 일언지하에 단호하게 거절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고통이 있었기에 나는 겸손의 옷을 입고 기쁨의 노래를 부르며 하루하루를 살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어려움을 겪기 전에는 감사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아주 사소한 것에도 감사할 줄 알게 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숨을 쉬며 가볍게 일어나는 것, 내 사지를 움직여 씻고 음식을 만들고 먹을 수 있는 것, 남편이 12년째 투병하며 내 옆에 살아 있는 것, 아주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삶을 살던 시아버지가 대세를 받고 장례미사를 하게 된 것들이 감사하고, 시어머니가 천주교 묘원에 묻힌 남편 옆에 가고 싶어서 또 장례미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누리는 은총을 체험하고 세례를 받기로 결심한 것, ‘미신교’를 믿었다고 해도 억울하지 않을 만큼 평생 매달렸던 것을 훌훌 벗어던지며 빨리 주님의 자녀가 된 것, 주일미사에 가는 게 즐거워 한 주 내내 성당에 입고 갈 옷을 윗목에 챙겨두고 생기 있게 사는 것을 보는 것도 감사하다. 그리고 내가 사는 삶, 특히 늘 약골로 살던 내가 간병으로 기진맥진한 채 손가락, 발가락에 염증을 달고 살면서도 피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하느님께 의지하고 함께 사는 것에 감화되었다며 친정 언니와 딸, 그 애들까지 세례를 받고 온 가족이 함께 미사에 다니게 된 것은 더더욱 감사하다.

이제 나는 늘 나를 미움의 늪에 빠뜨린 ‘고통스런 시집살이’도 ‘나와 그들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해서 자초한 것이고, 다른 사람에 대해 ‘수시로 섭섭한 마음을 갖게 된 것’도 ‘받기를 기대하는 사랑’을 했기 때문이며, 이제 겨우 50대 후반인데 ‘노쇠한 노인 같이 사는 것’도 ‘자신을 혹사만 하고 사랑하며 아끼지 않은 탓’이라는 값진 깨달음을 얻었다. 무엇보다도 고통을 겪으며 살아온 모든 것을 통해 내가 주님을 알기 훨씬 이전부터 주님께서는 나와 함께 하시며 인간적인 본성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것도 기꺼이 선택하도록 나를 이끌어주시고 보살펴주셨음도 깨닫게 되었다. 이제 지금부터 남은 시간은 주님께 나를 온전히 봉헌하고 주님의 뜻에 따라 기쁘게 살아가도록 변화시켜 주시기를 기도하며 사는 것으로 채워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