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원목신부로 발령을 받고 나서 많이 받았던 질문이 “거기서 주로 뭐하냐?”였습니다. 이 물음은 원목신부로서의 기본적인 성사적 업무를 이해하시는 분들의 질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성사적 업무 외에 ‘주로 하는 일’은 ‘만나는 일’이라고 답해주었습니다.
환우 분들을 만나고, 보호자들을 만나고, 직원들을 만나고 봉사자를 만나는 일, 그것이었습니다. 글쎄요,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 중에 전인병원의 원목실을 방문해 보신 분이 얼마나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한 번이라도 저희 원목실을 와보셨다면 ‘만나는 일’이 이곳에서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알게 되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희 원목실은 제 개인적인 업무를 보는 공간만이 아니라 백여 명의 봉사자가 수시로 드나드는 공간이며, 환우 분들과 보호자 분들이 언제든 찾아와 고민을 나누거나 상담하는 공간입니다. 거기에 보태어 가끔씩 진료를 받으러 오시는 신부님, 수녀님들의 찻집이기도 했습니다.
했습니다, 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나니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원목실이 그랬었구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지금 제가 앉아 있는 원목실은 너무도 고요합니다. 가끔씩 원목실 앞에 마련된 데이룸(적당한 높이의 책상과 책들이 비치된 곳으로 햇볕이 아주 잘 드는 휴게 공간입니다.)에 와서 트로트 영상을 즐기시는 분들의 방문이 그나마 생기를 줄 뿐, 그마저도 없다면 그야말로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공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루 종일 누군가를 만나는 일을 하다가, 이제는 만나는 일의 빈도가 줄어들고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나다 보니, 시끌벅적하고 정신없던 원목실의 활기가 조금은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게다가 병실 방문도 예전만큼 잦지 않아서인지, 요즘엔 말하는 시간보다 말을 하지 않는 시간이 더 길어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절대 조용히 있는 성격이 아닌지라, 조심히 병원 여기저기를 다니며 직원 분들을 만나곤 합니다.)
그렇게 여전히 병원 여기저기를 오며가며 환우 분들이나 보호자분들, 간병인들과 마주치면 어김없이 인사를 드리며 안부나 근황을 물으며 시간을 보내곤 하는데, 인사를 드릴 때 마다 어째, 예전보다 반응들이 시원찮습니다. 옷이 달라져서 그런가? 아니면 다들 코로나19로 인해서 많이들 지쳐서 그런 것인가? 생각이 많아졌는데 나름의 이유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제 무기를 잃어버린 탓이었습니다.
잘나지는 않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인사를 할 때 제일 자신있게 사용했던 저만의 무기(?)는 바로 밝게 웃는 표정이었는데, 이놈의 마스크가 저의 무기를 앗아가 버린 것입니다. 저는 여전히 마스크 안에서도 밝게 웃으며 인사를 드리는데도, 상대방은 마스크 속 숨겨진 제 표정이 보이지 않으니, 그저 맞절 인사만으로 응대를 하실 뿐이었던 것이지요.
처음에는 그렇게 인사를 드려도 반응이 예전같지 않아 못내 섭섭했던 적도 있었는데, 원인을 알고 나니, 이제는 잘 쓰던 무기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마스크로도 가릴 수 없는 나만의 무기를 찾아야만 했습니다. 그래도 제가 병원에서 ‘주로’ 하는 일이 사람을 만나는 일인데, 고작 마스크 때문에 무기를 잃은 채 살아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물론 요즘에 마스크는 ‘고작 마스크’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물건이긴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저만의 무기 찾기를 위해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습니다.
먼저 첫 번째 작전은 눈웃음. 입은 안 웃어도 당장 보이는 눈이라도 웃으면 될 것 같아 눈가의 주름을 잔뜩 잡아 인사도 드렸습니다. 하지만 저의 작은 눈은 웃어도 웃지 않아도 큰 차이가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게다가 안경까지 끼고 있어 결과적으로는 실패!
두 번째는 목소리 톤을 평소보다 좀 높여서 인사드리기. 입 웃음, 눈웃음으로도 안 통한다면, 청각적으로 전해지는 목소리로 다가가야겠다는 이 작전은 처음엔 꽤나 쏠쏠한 반응들과 대화를 유도했지만, 저 혼자만 너무 밝게 지내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특히나 몸도 마음도 많이 지치신 분들에게는 오히려 역효과를 드리는 것 같아 부분적으로 실패!
마지막으로 현재에도 하고 있는 것은 지금까지 했던 것들을 모두 활용하되, 허리를 평소보다 더 깊이 숙여 인사하기. 사실 평소에도 땅에 뭐 떨어진 것을 주워도 될 정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거 아니냐는 소리를 어떤 직원 분께 듣긴 했는데, 그래도 그렇게 인사하는 것이 불편하지 않았기에 지금은 마스크에 가린 입도 방긋! 작아서 잘 보이지 않는 눈도 방긋! 목소리는 적당히 한두 톤 정도 높이! 허리는 평소 때보다도 깊이!
사실 이렇게 하고 있는 요즘에도 다들 예전만큼의 반응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하고 나니 평소보다는 한두 마디씩은 더 대화로 이어지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여전히 잃어버린 저의 무기를 대체한 다른 방법들을 찾고 있기도 하고요.
하염없이 길어지기만 한 요즘의 하루하루가 마냥 답답하기만 하고, 얼른 지나가기만 바라는 마음은 누구든 같을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석학들이 예견하듯 어쩌면 우리의 삶은 코로나19 이전으로는 정말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오직 하느님만 아시겠지요. 그렇다한들, 우리의 하루를 그냥 내버려두어서 되겠습니까? 모든 것을 뺏긴 채로 시간만 흐르길 기다릴 순 없습니다.
다시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하고, 그럼에도 지금 서로에게 기쁨이 되고 희망이 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야 합니다. 함께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체험인지를 여전히 우리는 맛보고 살아가야 합니다.
‘만나는 일’이 저의 ‘주된’ 일이었는데, 그것을 못하게 되었다고 마냥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겠습니까? 다른 방법으로라도 ‘만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요즘 ‘주로’ 무엇을 하시나요? 아니 예전에는 무엇을 ‘주로’ 하셨나요? 하루하루 삶의 활력을 잃어버리게 놔두지 마시고, ‘주로’ 하셨던 일들, 그리고 지금 ‘주로’ 하고 있는 일들을 되찾아 가시면 좋겠습니다. 방법이나 방식은 조금 바뀌어도 그 일들의 본질은 바뀌지 않을 테니까요.
가장 자신있던 무기를 잃어버린 저도, 다시 살아갈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마스크를 벗지 않아도 제가 항상 웃으며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제가 만나는 분들이 진심으로 느낄 수 있을 때까지 저는 계속해서 저의 일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혹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조심스레 추천을 부탁드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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