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에 들어서면 오방 깃발이 펄럭이는 대나무가 전봇대만큼이나 크게 서 있습니다. “사정 김보살”이란 팻말은 문패의 다섯 배 되는 크기로 떡하니 붙어 있습니다. 꽤나 이름이 알려진 무속인집, 바로 우리집입니다.
어머니가 점을 봐주고 굿을 하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고 그 돈으로 학비를 내고 중, 고, 대학교에 다녔습니다. 집으로 배달되는 우편물에는 ‘점하는 집’이란 표기가 붙어 다녔고, ‘점쟁이 아들’, ‘무당새끼’라는 소리가 따라다니던 환경이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집안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를 이겨야겠다는 마음과 어머니의 의식이 악마라는 생각에서 악을 물리친다는 의미로 대천사 ‘미카엘’이란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일학교 교리교사 활동을 하고, 매주 나환자촌을 방문해 교리를 전달하는 등 봉사활동을 하며 나름대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했습니다.
“저놈의 자슥은 성당 일에만 미쳤어! 더러븐데 물들어가 참말로 큰일이데이….”라는 아버지의 이런저런 욕을 들으면서도 어머니가 차려놓은 신당과 공부방을 같이 써야 하는 처지인지라 무시무시하게 보이는 온갖 물건들이 가득 차 있는 방 맞은편 벽에는 십자고상을, 책상 위에는 성모마리아상을 모셔놓고 공부했습니다. 그때부터 수도원에 들어가서 수사신부가 되겠다는 꿈이 싹텄으나 울면서 땅을 치고, 가슴을 쥐어뜯고, 나뒹굴면서 죽으려고까지 하시는 어머니와 가족들의 극심한 반대로 그 꿈을 접고 결혼해서 경주를 떠나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너는 집안환경이 그러니까 세례를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던 숙부님도 제가 세례를 받자 30년 동안의 냉담을 풀고 성당에 나오시게 됐고, 개신교 장로였던 작은 아버지와 그 가족 모두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큰 동생 가족들도 모두 세례를 받게 됐습니다. 비록 무속인 부모님에 대한 반감으로 시작된 신앙생활이었지만 이제는 부모님께도 신앙을 갖게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해졌습니다.
그러나 고향인 경주에 한 번씩 내려올 때마다 점을 치고 굿을 해서 먹고 사는 집안 환경이 너무나 싫어서 아무에게도 집을 보여주고 싶지도 않았고 집안 얘기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부모님과의 갈등과 대립은 점점 심해졌습니다. 그럴수록 부모님은 더욱더 굿을 하고 점을 치는 생활로 영위하셨고 제가 성당에 가자고 할 때마다 “야, 이놈아. 내가 이 생활 안 했으믄 뭐 묵고 살았겠노? 이걸로 느그들 다 공부시키고 여태 살았다. 조상이 돌봐주고 명신이 살펴주고 있는데 우째 이걸 치우노? 택도 아인소리 하지마라.”는 말에 저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과감히 생각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부모님과 대립각을 세우고 반대하면서 무조건 무속인을 그만두고 성당에 나가자고 강요하기 보다는 먼저 부모님의 환경을 이해하고 서로 화해하고 사랑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누가 “보살님 계시능교?” 하고 찾아오면 부모님보다 먼저 나가서 웃으며 반겼고 집에서 굿을 할 때에도 화를 내며 자리를 피하지 않고 고막이 터져 나갈 것 같은 북소리, 징소리 속에서 묵주기도를 드리며 굿을 참관했습니다. ‘그 누가 아무리 뭐라 해도 나의 신앙은 절대 흔들리지 않고 변함이 없다!’, ‘가톨릭은 모든 걸 다 포용하고 이겨낼 수 있는 가장 큰 힘이 있는 종교다!’라는 제 자신감과 믿음이 이런 행동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그러자 드디어 조금씩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주위에서 “아이고 얄굿데이. 이집 아들은 성당 댕기는 가베? 그런데 우예 이래 굿하는데 다 와가 있노?”라며 제 모습을 신기해하더니 결국 어머니께서 굿을 하던 도중에 제 손을 꼭 잡고 울면서 “큰아야, 니는 우야든동 성당에 열심히 댕기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부터 성당활동은 조금 자유로워졌지만 여전히 ‘무당’, ‘점집’이란 현실이 너무 싫고 창피하고 힘들었습니다.
제가 운영하던 회사가 어려워지자 경주의 부모님 댁에는 부적이 들어있는 저의 예비군복이 걸려있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뭘 이런 걸 걸어놨냐며 화를 내고 싸웠겠지만 명찰 안에 고이 접힌 부적을 확인하고도 그냥 웃어넘기며 부모님께 저의 성당활동, 성경, 나환자촌 봉사 등의 이야기를 하면서 조금씩 기본교리를 해나갔습니다. 그러던 중 사업이 완전히 망해서 제 명의로 되어있던 모든 재산이 날아가고, 가재도구는 경매로 넘어가고, 사채업자들에게 시달리다 조직폭력배에게 끌려가기도 하고, 청산가리를 들고 와서 열흘씩 저희 집 거실에 드러누워서 단식 농성을 하는 여목사의 행패를 겪으면서 저는 부모님께서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해서 모시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더 강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모님 모두 중풍으로 쓰러지면서 거동을 못 하게 되셨습니다. 어머니는 요양원에 모셨지만 아버지는 끝까지 안 가겠다고 하셔서 불편한 몸으로 혼자 집에서 지내게 되셨습니다. 정말 난감한 상황이었으나 한편으로는 가장 힘든 고통의 순간이 곧 기회였습니다. 어머니가 요양원에 계시는 틈을 타 동생들과 합심해서 집에 있는 신당을 절로 옮기자고 어머니를 설득해서 신당을 철거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 후 떨어져있기 싫다고 우는 딸을 홀로 두고 경주로 내려왔습니다.
제가 고향으로 오자마자 어머니는 더 이상 요양원에서 지내지 않겠다고 하셔서 결국 거동이 불편한 두 분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떨어져 있다가 갑자기 같이 생활하게 되니 의견 충돌이 심했습니다. 게다가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기계로 잴 수 없는 높은 당뇨수치, 급성 폐결핵, 췌장의 50%가 망가졌다는 진단을 받은 저는 체중이 73kg에서 48kg까지 빠지면서 길어야 6개월이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건강이 나빠졌습니다. 포항성모병원의 독방에서 입원치료를 받고 퇴원했지만 열 걸음만 걸어도 숨이 차 앉아서 쉬어야 했고 먹으면 토하기를 반복하기를 8개월… 그럴수록 ‘부모님께서 세례를 받도록 해야 한다.’, ‘부모님보다 내가 먼저 죽을 수는 없다.’라는 소명의식이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본당 신부님께 부모님, 두 분 다 거동이 어려워 성당에 직접 나갈 수가 없다면서 방문교리를 청했습니다. 방문교리를 받는 중에도 어머니는 감기 기운이 조금만 있어도 칼에 물을 뿜고 던지면서 객귀 쫓는 의식을 행하셨고, 하지 말라고 말리면 어머니보다 아버지가 더 역정을 내셨습니다. 그리고 누가 찾아오면 “내가 빨리 죽어야지. 약 묵고 죽고 싶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습니다. 저는 동생에게 “90년이 넘도록 그런 생활을 해오셨는데 와 하루 아침에 바꿀라카노?”라는 원망도 들었지만 식탁에 기도문을 커다랗게 써놓고 자연스럽게 접하게 해드렸고, 그림성경책을 갖다놓고 늘 보시게 했으며, 글씨가 잘 안보이지만 주보랑 매일미사책도 갖다드렸습니다. 날마다 아버지를 안고 뽀뽀하고 볼을 부비기도 하고, 어머니의 손을 잡고 춤추고 노래하고 웃고 박수를 유도하며 서로의 거리감을 좁혀갔습니다. 이미 손자를 둘이나 둔 환갑이 된 저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부모님께 어린 시절의 아들 모습으로 돌아갔습니다.
수녀님과 봉사자의 정성어린 방문교리로 부모님은 차츰 마음의 문을 열게 됐고 교리를 시작한 지 6개월여 만인 2016년 9월 6일에 아버지는 ‘베드로’, 어머니는 ‘마리아’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30여 년간 꿈꿔온 제 평생의 소원이 기적처럼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하염없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감격에 끊임없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외쳤습니다.
돌이켜보면 저의 평생 소원이 이렇게 기적처럼 이루어진 것은 다음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①어머니의 무속인 생활이 너무 밉고 싫어서 그에 대한 반감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결국 어머니의 무속인 생활이 저를 주님께로 인도하게 된 원동력이라는 생각으로 무속인 부모님을 반대하고 미워만 하는 게 아니라 받아들이고 이해하며 서로 화해하고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②제가 설립한 회사에 투자 유치가 잘되고 자금이 풍족했을 때 단 한 푼이라도 개인적으로 횡령하거나 유용했다면 처벌을 받아야 해서 부모님을 모시고 살면서 세례 받게 하기 힘들었을 텐데 숱한 유혹을 물리치고 끝까지 양심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③회사운영이 잘 될 때에는 부모님께서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었는데, 한순간에 모든 것(회사, 돈, 명예, 건강)을 다 잃고 나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와 용기가 생겼고 모든 욕심을 버리고 무조건 믿고 실행에 옮기다보니 결국 크나큰 은총으로 제 평생의 소원을 이루게 해주셨습니다. ④여기에는 당연히 신부님, 수녀님, 봉사자님의 애정어린 노력이 보태졌습니다. ⑤무엇보다 내가 사랑하는 천사 같은 아내의 헌신적인 내조가 있었기에 모든 것이 가능했습니다.
지금은 신부님이신 처남이 집에 오시면 부모님과 같이 가정 미사도 드리고, 매월 봉성체도 빠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주 행복한 마음으로 웃음 코칭 강의 봉사도 하면서 건강을 되찾아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식사 때마다 성호 긋는 것을 잊지 않는 부모님이 제 신앙생활의 스승이요 모범이 되시고, 부모님을 통해 저의 부끄러운 신앙생활을 반성하면서 남은 생의 가장 젊은 날인 오늘을 은총과 기적으로 열면서 감사와 사랑과 행복으로 일기장의 한 페이지를 장식해가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멘!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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