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공군 군종에서 사목 중인 김병흥 세영 알렉시오 신부입니다. 2015년에 임관해서 군종 사목을 한 지 벌써 5년이 다 되어갑니다.
군종사목을 하기 전 저는 제가 군복무를 했던 육군 병사생활에서 느꼈던 미사와 신앙에 대한 목마름을 겪고 있을 군장병들을 위한 사목을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훈련을 받고 나서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공군으로 배치를 받고 나서 처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마음으로 공군 군종사목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경북 예천에서 시작해 대구에 왔다가 강릉을 경유해 지금은 청주에 내려와 있습니다. 예천비행단에서는 처음하는 군종 생활이라 어렵고 막막했지만 기쁘게 지냈고, 여단생활에서는 산 속에 흩어져 있는 포대 병사들을 찾아 경상도와 전라도를 누비며 뛰어다녔습니다. 특히 사제관을 처음 마련할 때 집기가 없어서 손빨래를 했고, 그 더운 여름에 에어컨도 없이 버티며 냉장고도 없어서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 생수를 담궈 놓고 먹는 등 추억들이 가득합니다. 교구 사제로 살았더라면 평생 살아 볼 기회가 없었을 강원도 강릉에서의 생활까지… 오랫동안 군종사목을 하신 선배사제들에 비하면 별 것 아니겠지만 그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나름 바쁘게, 또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공군은 육군보다 상대적으로 그 수가 적기 때문에 신자도 많은 편이 아닙니다. 제가 사목했던 여러 비행단이나 여단의 경우도 신자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주일미사 참례자가 40~50명 정도로 공소 크기로 보시면 됩니다. 솔직히 평일미사 참례자가 10명이 넘은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신자 없이 군종병과 미사를 하기 일쑤였고 처음에 가졌던 열정도 조금씩 식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강론을 못해서 사람들이 없나?’ 아니면 ‘활동이 부족해서 그런가?’ 하며 속앓이를 하던 저는 군종 동기 사제들과 만났을 때 신자가 많아서 열심히 뛰어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막막해지기도 했습니다.

군대는 황금어장이라고 했는데 저는 황금어장에서 물고기를 잡기는 커녕 그물에 걸린 물고기 관리도 힘들어 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문득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처럼 말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훤칠한 외모로 사람을 끌어당기는 호감형도 아닙니다. 게다가 에너지가 넘쳐서 사람들을 휘어잡을 만큼 활동적이지도 않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천주교에 대해 호감을 느끼게 하고 성당이 부담없이 편하게 올 수 있는 곳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 9, 40)라는 말씀이 왜 그렇게나 마음에 와 닿았는지요.
‘그래, 욕심 때문에 억지로 세례를 주기보다는 나중에라도 우리와 함께할 잠정적인 신자를 만들자.’고 결심한 저는 만나는 병사들과 부대 사람들에게 천주교에 대한 호감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쪽으로 사목 방향을 잡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신자는 아니지만 성당에서 시간을 보내는 병사들이 생겨났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밥을 해 먹이면서 고민을 같이 나누었고, 간부들에게도 ‘쉬고 싶으면 언제든지 올 수 있는 성당’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공군 군종 사제단의 숫자가 많지 않아서 서로 의지하고 도와주며 사목을 공유하는 사제단의 분위기 덕분이었습니다.
축구에 다양한 포지션이 있는 것처럼 군종사목을 하면서 세례라는 골을 많이 넣으면 그것이 군대라는 황금어장에서 제대로 사목하고 있다는 결과가 되니 주목받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굳이 제가 하지 않아도 됩니다. 군종 전체에서 바라보았을 때 무리해서 사람을 끌어들이려다 놓치는 것보다 잘할 수 있는 이에게 신앙의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 저의 역할이라 생각했습니다. 제가 사목하고 있는 곳에서 신자들의 내실을 다지고 부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친근하게 느끼게 하는 것이 제 목표였습니다. 이런 못난 저의 노력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제 뒤에 추수할 사제들을 보내주셨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렇지 않은 것이지만 제가 노력 해 놓은 것을 뒤에 오는 선·후배 신부님들이 결실을 맺어 주었습니다. 제가 씨를 뿌리고 관리를 해놓고 가면 거두는 사람이 와서 추수를 해줍니다. 저는 여기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느끼고 사제단을 향한 믿음과 결속력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5년 동안 네 군데의 본당에서 지내면서 이곳저곳 병사들을 위해서 뛰어다녔습니다. 특출나지는 않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최선을 다해 노력했습니다. 남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실적에서는 뒤쳐졌을지 모르지만 항상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할 수 있는 것을 해 왔습니다. 눈에 보이는 실적으로는 한없이 모자라는 그저 그런 군종신부지만 지금도 이 자리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 하려고 합니다.
탈렌트가 적기에 고뇌와 좌절도 많이 했지만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저의 자리마다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내고 살아가려 합니다. 그렇게 살다 보니 어느덧 대구대교구에서 생활한 시간보다 군종교구에 파견된 시간이 더 많아졌습니다.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크지만 아직 저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기에 좀 더 힘을 내며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현재를 살아가며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 20)는 성경 말씀이 계속 생각납니다. 작지만 아담한 우리 공군 공동체와 군 생활 가운데 힘들어하는 이들을 위해서 제가 가진 것을 좀 더 쏟아내 보리라 다짐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모자란 저조차도 도구로 쓰고 계십니다. 신자 여러분께서도 각자에게 맞는 부르심이 있다고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매일매일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며 하느님 나라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시기를…대구와 좀 떨어진 곳에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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