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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가르쳐 주는 교리
스스로 하루를 선택하라!


전재현(베네딕도)|신부 .대구대교구 사목국 청소년담당

마음열기

작년 이맘 때 즈음의 일입니다. 청소년 사목의 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해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리더쉽 트레이닝 코스에 참여하였습니다. 신자들과의 만남이 대부분이었던 저에게 비신앙적인 모임에 참여한다는 것이 그렇게 낯선 일인지 몰랐습니다. 더군다나 그 코스는 리더쉽 트레이닝 코스였기 때문에 다수의 사람들 앞에 서서 소리지르고, 동작하고, 말하는 훈련을 반복해야만 했습니다.

 

나름대로 사제의 삶을 통해 그런 일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던 저이지만, 비신자들 앞에 나서는 것은 또 다른 흥분을 자아냈습니다. 은근 슬쩍 가톨릭 성직자라는 신분이 자신을 압박해 왔기 때문입니다. 사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쳐다보는 신자들의 시선과 호기심과 의문으로 가득 찬 비그리스도인의 시선은 확연히 틀렸던 것입니다. ‘혹시나 내가 말실수라도 하면 저 사람들이 사제를 어떻게 생각할까?’, ‘혹시나 내가 무리한 행동으로 사제의 이미지를 흐리지는 않을까?’

 

물론 저의 경우는 어느 정도 특별한 경험에 속하는 것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도 이와 유사한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특별히 어린 시절에는 타인들의 시선이 온통 자신에게로 쏠려있는 듯한 착각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선생님의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쩔쩔 매는 자신의 모습을 친구들이 언제까지나 기억할 것처럼 며칠이고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내성적인 아이일수록 그 기억은 더 오래 가겠지요.

 

이런 저런 걱정으로 쿵쾅거리는 가슴을 어찌할 줄 몰랐던 저는 생각을 고쳐 먹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어차피 사제의 신분을 떳떳이 드러내고 참여한 바에야 있는 그대로의 내모습이 곧 사제의 모습인데, 특별히 조심하느라 더욱 부자연스러울 필요가 있겠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아울러 부족한 것이 있으면 주님께서 채워주시리라는 믿음으로 더욱 당당해지기로 결심했습니다.

 

효과는 만점이었습니다. 7년간의 신학교 교육과 짧지만 2년간의 사제생활은 저를 타인들 앞에 당당히 드러내는 데 충분한 시간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11주간의 리더쉽 코스에서 한 주간 두 주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쉽사리 제게 다가와 말을 걸고, 어떤 이는 ‘사실은 저도 가톨릭 신자예요.’라며 냉담했던 자신을 고백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수료식에서 제가 사회를 맡았던 것을 생각해 보면 지금도 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지게 됩니다.

 

저의 경험에서처럼 사람은 자신의 태도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상황이나 사건은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 하더라도, 거기에 대한 태도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자신만이 선택한다고 말해야 옳은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성장하면서 자신을 억압하는 부자연스러움에서 벗어나고 싶어하지만, 자신의 태도를 긍정적으로 또 창조적으로 이끌어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스스로 태도를 선택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부모가 겪었던 혼돈을 그대로 물려주어 자녀들의 성숙이 또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해서는 안되니까요.

 

생각하기

어쩌면 이러한 조바심은 불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즈음 아이들은 가상공간을 무대로 정보의 홍수 속에 살아가는 인터넷 세대로,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부모보다 더 똑똑한 신인류로 지칭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지식이 늘어난다고 결코 빨리 성숙한다고 볼 수는 없겠지요. 고학력에도 불구하고 철부지처럼 행동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하느님 앞의 피조물로서 신앙이 성숙하는 것은 머리로만 가능한 것이 결코 아님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적·신앙적 성숙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그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그 자유의지로 인간은 선행을 하기도 하고 죄를 짓기도 합니다. 그 자유의지로 아이들은 인터넷에서 유용한 정보를 얻기도 하고, 음란물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시어 우리가 스스로 삶을 선택해 나가도록 배려하셨고 그러한 선택에 따라 각자는 변화하고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녀들에게 스스로 삶을 선택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겠습니까? 함께 묵상해 볼 만한 성서구절들을 찾아 보았습니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너희 앞에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내놓는다. 너희나 너희 후손이 잘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여라.”(신명 30,19)

“주의 집 뜰안이면 천날보다 더 나은 하루, 악인의 편한 집에 살기보다는 차라리 하느님 집 문간을 택하리이다.”(시편 84,10) 

“나를 붙잡지 않는 자는 제 목숨을 해치게 되고 나를 싫어하는 자는 죽음을 택하는 자들이다.”(잠언 8,36)

“당신들은 또 이 백성에게 야훼의 말씀이라 하며 이 말을 전하시오. ‘내가 살 길과 죽을 길을 너희 앞에 내어놓을 터이니 너희는 그중 하나를 택하여라.’”(예레 21,8)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선행을 보시고 불러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뜻대로 불러 주시며 선택의 원리에 의해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십니다.”(로마 9,12)

 

우리 앞에 생명과 죽음이 놓여 있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우리는 누구나 선뜻 생명을 선택할 줄 압니다. 그러나 그렇게 선뜻 생명을 선택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이는 그 마음과 달리, 실제로는 죽음을 선택하고 그 선택한 것에 따라서 자신들의 앞날이 결정됨을 봅니다. 그것은 왜 그럴까요? 아마도 그것은 우리 앞에 주어진 그 생명이 그저 하나의 물건처럼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참 생명의 삶은 시장에 늘어놓고 파는 물건처럼 내가 눈으로 확인하고 만져 보아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와 우리 자녀들은 어떻게 생명을 선택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사람이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창조해 나갈 때 가능한 일입니다.

 

모든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까지도 거역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하느님의 뜻에 마음을 두고, 순간순간을 능동적으로 창조해 나갈 때 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매일같이 아침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학교에 지각하는 것이 늘 걱정인 아이가 있는 반면에, 항상 일찍 일어나 준비물도 꼭꼭 챙겨서 여유 있게 등교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또 어떤 이는 바쁜 생활에 찌들려 늘 찌푸린 얼굴로 이웃을 대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늘 미소를 잃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대조된 모습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선택사항(Option)’으로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택해서 취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생활 태도가 그저 타고난 것인 양 살아가는 것은 성숙을 방해하는 원인이 됩니다.

그래서 앞의 예에서 전자를 선택한다면, 그것이 바로 지옥의 삶(죽음)이 되고, 후자를 선택한다면 그것이 바로 천국의 삶(생명)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실천하기 

정신의학자 칼 메닝거(Karl Menninger)는 “태도는 사실보다 더 중요하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것은 자신감을 잃은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학적인 말이자 심리치료에 있어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말입니다. 아울러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에게도 꼭 필요한 말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가 생명과 죽음 가운데 망설임 없이 선뜻 생명을 선택할 줄 아는 것처럼 스스로 기쁜 하루를 선택하고 즐겁게 일상을 가꾸어 갈 수 있다는 것도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반복되는 일상 생활 속에서도 스스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별 생각 없이 지나가는 일상의 삶을 대하는 아이들의 태도는 그들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음을 알아들어야 하겠습니다. 자녀들에게 매일 아침 한가지씩 창조적인 결심을 하도록 해 보면 어떨까요?

 

‘오늘만큼은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미소로 대해 줘야지!’, ‘오늘 하루 동안은 꼭 한 가지라도 선행을 실천해야지!’

 

바로 이렇게 하느님의 뜻에 마음을 두고, 스스로 자신의 하루를 선택하여, 창조적으로 가꾸어 나가는 삶이 예수님을 깨어 기다리는 대림시기의 삶이며, 신앙인의 삶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