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7일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 요한 3,16-18
◎ 어느 분이 짧은 말로 예수님을 이 자리에 초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님, 성령의 빛으로 저희의 눈을 여시어 주님의 길을 보게 하시고, 저희의 귀를 여시어 생명의 말씀을 듣게 하소서. 아멘)
● 말씀 읽기
어느 분이 요한복음 3장 16-18절을 큰소리로 천천히 읽어주십시오.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 세밀한 독서
다음의 사항들을 살펴보며 본문의 말씀을 각자 천천히 읽겠습니다.
- 하느님께서 외아들을 세상에 내주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16절)
- 외아들을 믿는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16절)
- 하느님께서 아들을 통해 세상에 이루시려는 일은 무엇입니까?(17절)
- 아들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각각 어떻게 됩니까?(18절)
복음말씀을 누가 한 번 더 천천히 읽어주십시오.
● 새겨 듣기
잠시 침묵 가운데 복음을 통해 들려주시는 말씀을 곰곰이 새기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가집시다.(3~5분)
<말씀길잡이>
사랑해 보셨습니까?
누구를 / 얼마나 / 그래서 어떻게 사랑해 보셨습니까?
갑작스럽고도 짧은 이 질문에 사람들은 어떤 대답을 할 까요?
같은 질문을 하느님께 해 보면 아마도 이런 대답이 나오지 않을까요?
세상을 / 너무나 / 그래서 내 외아들을 내주었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흔히 우리가 믿는 신앙이 무엇인지를 물으면, 구약과 신약 성경에 기록된 하느님의 구세사를 열거하고, 주일미사 때마다 외워 바치는 신앙고백이라고도 하며, 교리나 신학의 내용들 가운데 우리가 반드시 믿어야 할 것들을 설명하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믿어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셨다.’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고백입니다. 이 하느님의 사랑고백을 믿을 때, 우리는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 사랑고백을 얼마나 믿고 계십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믿지 못합니다. “사랑합니다.”라고 하면, 기쁘고 감탄하기보다 “왜?”라고 반문하며 사랑하는 이유를 묻는 것에 더 익숙합니다. 이렇게 사랑에 대한 신뢰보다 의심이 더 큰 것은 수많은 사기와 거짓, 배반과 배신으로 물든 시대와 세상 때문일까요? 아니면 ‘사랑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해서’, ‘사랑을 마음껏 해보지 못해서’, ‘스스로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여겨서’ 일까요?
사랑이신 하느님의 또 다른 이름인 삼위일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 외아들을 내주셨습니다. 이렇게 늘 하느님의 사랑이 먼저입니다. 사랑은 자격이 없는데도 주어지는 선물이지, 노력에 대한 결과이거나 어떤 보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너무나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고, 그래서 당신의 외아들을 나에게 내어주셨다는 것을 믿고, 이 믿음으로 내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지금! 나는 신앙인으로서 그동안 무엇을 믿으며 살아왔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 사랑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 나누기
오늘 하느님께서 나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을 짧게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 실천하기
지난 주 결심하고 실천했던 것을 나누어 봅시다. 결과나 보상을 바라지 않고 조건이나 자격 없이 사랑을 주거나 받은 경험을 나누어 보고, 늘 먼저 사랑하시는 거룩한 삼위일체의 사랑을 제대로 믿을 수 있는 은총을 청해 봅시다.
● 청원기도
우리 반공동체, 본당공동체, 지역공동체, 우리나라, 지구촌 공동체에 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시간입니다.
● 마침기도
마침성가는 가톨릭 성가 81번을 부르겠습니다.
* 위 성가는 예시 자료입니다. 자유롭게 성가를 고르셔도 됩 니다.
6월 14일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 요한 6,51-58
◎ 어느 분이 짧은 말로 예수님을 이 자리에 초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님, 성령의 빛으로 저희의 눈을 여시어 주님의 길을 보게 하시고, 저희의 귀를 여시어 생명의 말씀을 듣게 하소서. 아멘)
● 말씀 읽기
어느 분이 요한복음 6장 51-58절을 큰소리로 천천히 읽어 주십시오.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52 그러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5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54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58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 세밀한 독서
다음의 사항들을 살펴보며 본문의 말씀을 각자 천천히 읽겠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자신을 무엇이라고 하십니까?(51절)
- 이 빵을 먹는 이는 어떻게 됩니까?(51절)
-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진 이유는 무엇입니까?(52절)
-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53-54절)
-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사람은 어떤 상태가 됩니까?(56-57절)
-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과 조상들이 먹은 빵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58절)
복음말씀을 누가 한 번 더 천천히 읽어주십시오.
● 새겨 듣기
잠시 침묵 가운데 복음을 통해 들려주시는 말씀을 곰곰이 새기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가집시다.(3~5분)
<말씀길잡이>
남극의 펭귄은 알을 낳은 뒤, 암컷과 수컷이 번갈아가며 알을 품기와 음식 구해오기를 합니다. 특히 알이 부화하여 새끼가 나오면, 더 먼 바다로 나가 많은 음식을 뱃속에 저장해 와야 합니다. 그래야 몸집이 커가는 새끼가 먹을 만큼 충분한 음식을 토해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기 펭귄이 자립하여 바다로 나갈 때까지 암컷과 수컷은 교대로 새끼를 지키며, 번갈아가며 음식을 구해오기를 반복합니다.
모든 동물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음식을 먹습니다. 우리는 이를 음식에 대한 욕구라고 하며 이는 동물의 본능입니다. 이렇게 내 배를 채우기 위해 음식을 먹는 것은 본능이지만, 자식을 먹이기 위해 고생과 굶주림을 마다하지 않는 것을 우리는 ‘모성애, 부성애’, 즉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내 입에 들어온 음식을 삼키는 것은 본능이지만, 그것을 남을 위해 내어주는 것은 사랑입니다. 이렇게 사랑은 본능을 거스릅니다.
모든 부모님들이 이런 사랑으로 자녀를 길러냅니다. 그 사랑은 음식을 먹이는 표징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아이가 어느 정도 성장했을 때, 그래서 더 이상 주지 않아도 스스로 찾아 먹을 수 있을 때, 혹은 주는 것보다 더 먹고 싶은 것이 있을 때 자녀는 부모가 주는 음식을 거부하기도 합니다. “안 먹어! 먹기 싫어!”라는 아이의 거부를 마치 사랑에 대한 거부로 느끼는 부모님들의 마음은 혼란스럽고,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의 마음을 아는 아이, 음식이 부모님의 사랑임을 아는 아이는 다릅니다. ‘먹기 싫은 욕망’을 거슬러 맛있게 ‘먹는 사랑’을 선택합니다.
그러고 보니 세상에는 ‘먹이는 사랑’도 있지만, ‘먹어주는 사랑’도 있습니다. 한가위 명절에 철부지 아이가 고사리 손으로 빚은 울퉁불퉁한 송편, 새색시가 시댁에서 차린 어설픈 아침상, 생애 처음으로 아내를 위해 끓인 생일 미역국…. 간이 잘 맞고, 멋과 맛과 구색을 갖춘 음식은 아닐 수 있지만, 준비한 사람의 정성과 마음을 생각하여 ‘맛있게 먹어주는 사랑’도 분명 있습니다. 이렇게 사랑은 음식을 먹이고 싶어하고, 사랑은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게 합니다. 부모님의 자식을 위한 완전한 사랑이 ‘먹이는 사랑’이라면, 부모님을 향한 자식의 소박한 사랑은 ‘먹는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체와 성혈’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징표입니다.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기 위하여 자신의 살을 빵의 형태로 먹으라고 내어주는 ‘먹이는 사랑’의 징표입니다.
더 맛있는 것! 더 재밌는 것! 더 하고 싶은 것!
이런 욕망으로 먹기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먹이는 사랑’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욕망과 유혹은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기쁘게 ‘먹는 사랑’이 있다면, 욕망과 유혹을 거슬러 이겨낼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먹이는 사랑’과 ‘먹는 사랑’이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있고, 남편과 아내 사이에 있고,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도 있습니다.
모든 성사는 하느님의 은총을 드러내주는 징표입니다. 그 중에 음식이라는 사랑의 징표로 하느님의 은총을 보여주는 것이 성체성사이기에 우리는 성체성사를 ‘사랑의 성사’라고 합니다. 성체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살도록 하기 위한 ‘먹이는 사랑’에 ‘먹는 사랑’으로 응답해 드린다면, 아버지로 말미암아 영원히 살아계신 주님과 같이 우리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먹이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받아먹고 계십니까?
● 나누기
오늘 하느님께서 나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을 짧게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 실천하기
지난 주 결심하고 실천했던 것을 나누어 봅시다. 하느님의 ‘먹이는 사랑’의 징표인 성체성사를 제정해주신 예수님께 감사드리며, 평소보다 미사를 자주 봉헌함으로써 주님께 ‘먹는 사랑’으로 응답해 드리는 한주간이 될 수 있도록 합시다.
● 청원기도
우리 반공동체, 본당공동체, 지역공동체, 우리나라, 지구촌 공동체에 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시간입니다.
● 마침기도
마침성가는 가톨릭 성가 166번을 부르겠습니다.
* 위 성가는 예시 자료입니다. 자유롭게 성가를 고르셔도 됩니다.
6월 21일 연중 제12주일 : 마태 10,26-33
◎ 어느 분이 짧은 말로 예수님을 이 자리에 초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님, 성령의 빛으로 저희의 눈을 여시어 주님의 길을 보게 하시고, 저희의 귀를 여시어 생명의 말씀을 듣게 하소서. 아멘)
● 말씀 읽기
어느 분이 마태오복음 10장 26-33절을 큰소리로 천천히 읽어주십시오.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사람들을
26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2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28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29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30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31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32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33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 세밀한 독서
다음의 사항들을 살펴보며 본문의 말씀을 각자 천천히 읽겠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까?(26절)
- 예수님께서는 어두운 데서 말하는 것과 귓속말로 들은 것을 각각 어디에서 선포하라고 하십니까?(27절)
- 예수님께서 두려워하지 마라고 한 사람들은 어떤 이들이며, 어떤 분을 두려워하라고 하십니까?(28절)
-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 참새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어떤 일까지 해놓으셨습니까?(29-30절)
-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무엇보다 더 귀하다고 하십니까?(31절)
- 사도들이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안다거나 모른다고 증언하면 그분께서는 어떻게 할 것이라고 하십니까?(32-33절)
복음말씀을 누가 한 번 더 천천히 읽어주십시오.
● 새겨 듣기
잠시 침묵 가운데 복음을 통해 들려주시는 말씀을 곰곰이 새기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가집시다.(3~5분)
<말씀길잡이>
어린 아이들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뜨거운 냄비를 손으로 만지려 하고, 손에 잡히는 것은 입에 넣어보려 하고, 높은 탁자나 장롱 위를 거침없이 올라가 뛰어 내리려 하며, 자동차가 달리는 도로를 뛰어서 건너가려 합니다. 두려움이나 걱정보다 호기심이 더 크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위험에 대한 경험치가 부족하기 때문에, 잘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두려움을 모르는 아이들에게 부모님은 두려움이 무엇인지 가르쳐 줍니다.
“뜨겁다! 더럽다! 위험하다! 다친다! 아프다! 무섭다!”하며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그래야 위험으로부터 피할 수 있고, 안전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무엇을 두려워하고 피해야 되는지’를 배우며 자라다가, 점차 자신의 경험치와 타고난 기질과 조건을 통해 두려움을 스스로 깨달아 부딪혀 맞서기도 하고, 피해서 비켜가기도 합니다. 스스로 두려움을 감지 할 때가 되면, 더 이상 주변에서 ‘무엇을 두려워해야 할지? 무엇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지?’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고, 묻는 것도 부끄러워집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들은 요즘 무엇이 두려우십니까?
아는 만큼 두려워지는 법! 여러분은 무엇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많이 알고 계십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남의 시선과 평가’를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초라해 보이지는 않을지? 미움 받지 않을지?’신경을 씁니다. 또 ‘책임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실수하지는 않을지? 잘못되면 어떡하지?’ 걱정하며, 판단을 보류합니다. ‘불확실한 미래’를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더 가지려하고, 채우려하고, 모아두려고 합니다.
관심이 온통 세상과 물질과 자신을 향해 있기에 그와 관련된 두려움을 더 크게 느끼며 살아갑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살아가며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고, 무엇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지?’를 알려주십니다.
“너희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경험치가 부족하고 모르는 것이 더 많은 아이들은 두려움도 모릅니다. 그러니 아는 만큼 두려움도 많아지는 법이겠지요. 만약 아직도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 그리고 영혼을 어찌하지 못하는 세상에 속한 것들만을 두려워하고 있다면, 그만큼 우리가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 대해 모르고 있다는 말이겠지요.
지금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언젠가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예수님께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어떡하지?’라는 두려움이어야 합니다. 이제 다 컸다는 이유로 두려워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지 않는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은 ‘진실을 증언하는 것’ 입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그리고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나를 모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지금 두려워할 필요도 없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면서, 정작 두려워해야 할 것에 무감각하지 않았는지 생각해봅시다.
● 나누기
오늘 하느님께서 나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을 짧게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 실천하기
지난 주 결심하고 실천했던 것을 나누어 봅시다. 요즘 각자가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어떤 것인지 돌아보며,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과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을 분별하고 실천할 수 있는 지혜를 청해 봅시다.
● 청원기도
우리 반공동체, 본당공동체, 지역공동체, 우리나라, 지구촌 공동체에 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시간입니다.
● 마침기도
마침성가는 가톨릭 성가 400번을 부르겠습니다.
* 위 성가는 예시 자료입니다. 자유롭게 성가를 고르셔도 됩니다.
6월 28일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 마태 10, 37-42
◎ 어느 분이 짧은 말로 예수님을 이 자리에 초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님, 성령의 빛으로 저희의 눈을 여시어 주님의 길을 보게 하시고, 저희의 귀를 여시어 생명의 말씀을 듣게 하소서. 아멘)
● 말씀 읽기
어느 분이 마태오복음 10장 37-42절을 큰소리로 천천히 읽어주십시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8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9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40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4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 세밀한 독서
다음의 사항들을 살펴보며 본문의 말씀을 각자 천천히 읽겠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이 당신께 합당하지 않다고 하십니까?(37-38절)
- 예수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39절)
- 사도들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결국 누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됩니까?(40절)
- 예언자와 의인이 받는 상을 받는 이들이 그 상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41절)
-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이는 어떤 이라고 하십니까?(42절)
복음말씀을 누가 한 번 더 천천히 읽어주십시오.
● 새겨 듣기
잠시 침묵 가운데 복음을 통해 들려주시는 말씀을 곰곰이 새기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가집시다.(3~5분)
<말씀길잡이>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이 물음에 대한 순수한 아이의 대답 한마디에 부모님은 기분이 날아갈 듯 좋기도 하고, 반대로 한없이 실망하며 섭섭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클수록 기쁨과 서운함도 더 커질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하기 때문에 생기는 질문이기에 사랑이 없다면 “~ 보다 내가 더 좋아?”라고 물을 필요도, 궁금해 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니 “~ 보다 더 좋냐?”는 물음에는 “~ 보다 더 좋다.”는 사랑이 반드시 전제가 되어 있고, “~ 보다 더 좋다.”는 응답에 대한 기대가 묻어있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정말 아버지나 어머니, 아들과 딸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지를 알고 싶어서일까?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크기를 알아내어 당신에게 합당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가려내 구분하고 선을 긋기 위한 것일까? 만약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클 때에는 가족들에게 무심해도 괜찮다는 말일까? 과연 얼마나 사랑해야 예수님에게 합당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가족보다 더 사랑받고 싶은 질투나, 혹은 사랑의 크기를 측정하여 합당함의 당락을 결정하기 위한 계산이 예수님에게서 느껴지지 않습니다.
깊은 묵상에 빠졌다가 문득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하고 묻는 부모님의 마음이 생각났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물을 수 있는 질문! 큰 사랑이 전제가 되어 있어야 감히 할 수 있는 질문!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도저히 가질 수 없는 궁금함이었습니다. 만약 자신은 사랑하지 않으면서 ‘~ 보다 더 사랑받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부당한 요구이고 소유를 위한 욕망이며 부담스러운 속박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나 어머니,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라는 말씀의 의미를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부모님이 좋아? 내가 좋아?”, “자녀가 좋아? 내가 더 좋아?”라고 자신있게 물어볼 수 있을 만큼 이미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늘 먼저라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가 깨닫고, 느끼고, 알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사랑을 아는 것! 그것이 가장 예수님께 합당한 사람이 되는 조건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사랑하는 사람, 아들이나 딸을 사랑하는 사람은 알고 있습니다. 부모님이나 자녀들보다 다른 누군가를 더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를….
우리가 받고 있는 예수님의 사랑이 그만큼 큰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합당하냐? 부당하냐?’를 가려내기 위함이 아니라 부모님을 향한 사랑, 자녀를 위한 사랑과 같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나아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큰 사랑! 그 사랑보다 더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예수님의 당당한 고백입니다. 분명 ‘보다 더 사랑하라’는 요구이기 전에 ‘보다 더 사랑한다.’는 고백입니다.
나아가 그 말씀 안에는 ‘~ 보다 더 사랑한다.’는 응답을 듣고자 하는 기대가 숨어있습니다.
누구보다 더 나를 사랑하고 계신 주님의 사랑을 느끼며, 큰 사랑을 주고 계신 그분께 누구보다 더 사랑한다는 응답을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예수님께 합당한 사람입니다.
● 나누기
오늘 하느님께서 나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을 짧게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 실천하기
지난 주 결심하고 실천했던 것을 나누어 봅시다. 누구보다 더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께 합당한 사람이 되기 위해 우리 공동체가 함께 해드릴 수 있는 사랑의 응답에는 어떤 것이 있을지 나누어보고 실천해 봅시다. 그리고 교황주일을 맞이하여 하느님 백성을 위해 늘 기도하시며 애쓰시는 교황님의 영육간의 건강을 위해 공동체가 마음모아 함께 주모경을 바쳐 드립시다.
● 청원기도
우리 반공동체, 본당공동체, 지역공동체, 우리나라, 지구촌 공동체에 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시간입니다.
● 마침기도
마침성가는 가톨릭 성가 438번을 부르겠습니다.
* 위 성가는 예시 자료입니다. 자유롭게 성가를 고르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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