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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릉재(小陵齋) 화산통신
가을노래와 어머니


이정우(알베르토)|신부, 화산공소

어릴 적 부르며 놀던 노래로 가을노래가 제일 많았던가 보다.“가을이라 가을바람 솔솔 불어오면...”,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울 밑에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어언간 여름 가고 가을바람 솔솔 불어...”,“기럭기럭 기러기 북에서 울고, 귀뚤귀뚤 귀뚜라미 슬피 울 적에...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등 뭐 그 외에도 다양하다.

그런데 말이다 나에겐 이 노래가 - 제목을 잊었지만 - 가장 잊혀지지 않는다. 뭐냐면;

 

뒷동산 산∼길에 놀이질∼때

기러기 기럭기럭 울며 납니다

엄마품이 그리워 눈물이 나면

쪽마루 끝에 앉아 별을 헵니다

 

이 노랠 요즈음도 혼자 입 속으로 가만히 불러볼 때면, 나는 하염없이 맘으로 울기도 한다. 유년시절의 어머니, 어머니 생각 때문이다. 아니, 내가 나잇살이나 먹고 신학교(神學校)엘 가겠노라고 여쭈었을 그 무렵, 스무 일곱 맏아들에게 첨엔 아무 말씀도 못 건네시다가 이윽고 “내 그럴 줄 알았다. 넌 그러고도 남을 놈이니까.”라시며 뒤돌아서시던 어머님이었다. 그 후 나는 다섯 해 집으로 발길을 끊고 살았었다. 사제서품 때(1972년 12월 16일) 어머닌 비신자로서 나의 첫 영성체(靈聖體)도 받지 못하셨다. 그냥 신자석에 숨듯이 앉아 계셨던 것이다. 가톨릭 교리도 모르시고 성당 가기도 싫어하실 당시에 당신은 그래도 아들이 신부(神父)가 된다니까 와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었을까.

 

그 훗날 어머닌 영세를 하시고 성당 성모회(聖母會) 회장까지 맡으셨다. 농촌 본당의 어려운 살림을 걱정하시느라, 병원집 사모님이란 미명을 쓰고 교무금을 매달 몇 십만 원을 기꺼이 내시길 주저하질 않으셨다. 어머님이 뇌출혈 <뇌동맥류>로 선종 하셨을 땐, 온 읍내가 떠들썩하리 만치 조문객이 몰렸는데, 그 만큼 여러 사람을 남모르게 도와주셨기에 찾아 뵙는 이가 많았던 것이다.

 

나는 아직도 어머님이 그렇게 일찍이, 꼭 회갑 후 며칠만에 돌아가신 게 내 탓이라고 여긴다. 맏이가 장가 갈 준비를 다 갖추고 온갖 신접살이 그릇이니 도구니 아주 다 마련해 놓은 마당에 그만 ‘집’을 나갔으니, 그 참담한 심정<심사>이야 일러 무어라 하겠는가. 일자 소식도 없이 어디서 무얼 하고 사는지도 감감 모른신 채 얼마나 애타하셨을까. 속내로 멍이 든다더니, 바로 그런 것 때문, 나 때문에 당신이 병고에 사로잡혀 일찍 이승을 떠나신 것이다. 이 무슨 천추의 한(恨)인가.

 

그래서인지 어머니의 애창곡(?)이 이미자의 ‘황포돛대’와‘열풍’이었었다. “마지막 석양빛을 깃폭에 걸고 / 떠나는 저 배는 어데로 가는 배냐, / 어데로 가는 배냐!” 그리고 “...울어라. 열풍아 / 밤이 새도록”(둘다 가사가 맞는지 몰라.) 가을바람에 돛을 올리고 ‘물 맑은 밤바다에 떠나가는 강릉배’ 같은 인생살이요. 일생일대가 아닌가. 차암 어디로 가는 나그네<호모 비아또르 : Homo Viator>요, 환장하고 빌어먹을 삶이란 말인가. 하늘이여, 하늘이여.

 

위 가을노래 ‘뒷동산 산길에...’란 곡(曲)은 그 노랫말 내지 내용이 여러 가지다. 그 중에 내가 좋아하고 혼자서 또는 술자리에서 자주 부르는 게 있다. 그걸 여태 잊지 않고 부르면서 나는 어머님께 늘 사죄(!)하곤 한다. 그렇다. 나는 내 죄를 알고 그 죄를 용서받는 법도 안다. 과연 그럴까? 아무튼 요새도 내가 무작정 막무가내로 부르는 그 노래 가사를 여기 소개해 본다.

 

1)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 ∼도 좋∼지

배고플 땐 혼자서 따먹었다오

엄마엄마 부르며 따먹었다오

 

2) 밤 깊어 까∼만데 엄마 혼자서

하얀 발목 가∼볍게 내게 오시네

밤∼마다 꾸는 꿈은 하얀 엄마 꿈

산등성이 너머로 흔들리는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