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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몬시뇰의 세상이야기
물따라 세월따라(2)


김영환(베네딕도) 몬시뇰

이 글은 김영환 몬시뇰께서 사제생활 50주년을 앞두고 그동안 살아오면서 부모의 신앙생활이 가정 속에서 자식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그 느낀 바를 진솔하게 풀어낸 이야기이다.

급변하는 물질만능의 시대에서 부모들이 자식에게 보여주는 신앙생활과 그 옛날 몬시뇰 세대의 부모들이 자식에게 보여주었던 신앙생활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지금의 부모들에게 반성할 기회도 주어지는 이야기들을 그 옛날에 느꼈던 신앙과 생활에 대한 이야기들과 비교해서 들려준다.

 

한티는 해발 700m 고지라고 한다. 그 고지에 자리한 우리집 앞마당에서 석양을 바라보면 참말 아름답다. 산과 산 사이에서 서쪽으로 탁 트인 낙조의 경치를 볼 양이면 ‘하느님은 세상을 참 아름답게 만드셨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봄은 봄대로 가을은 가을대로 변화하는 주변 모습은 그때마다 새롭고 그때마다 ‘아∼ 아름답다.’고 느껴진다. 날만 새면 동네 친구들과 개울에 가서 가재도 잡고 여름이면 멱도 감고 가을이면 뒷산에 가서 밤도 줍고…. 풀과 나무와 구름과 바위, 바람과 새 소리에 따뜻한 햇빛이 비치는 산하며, 우리 역시 그 속에 사는 자연 그 자체였다.

 

놀다가 집에 들어가면 가난했으나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의 손길이 있었고, 누님들의 반가운 미소가 있었다. 비록 냉장고에서 막 꺼낸 시원한 주스나 초코파이, 피자는 없었지만 막 길어온 샘물이 있었고, 사랑이 듬뿍 담긴 눌은밥이 있었다. 나는 그렇게 신앙의 울타리 속에서 가족의 사랑과 자연의 맑은 공기와 아름다움 속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다섯 살이 되어서도 나는 서당에도 못 갔다.

 

고조 할아버지가 박해를 피해 사람 없는 곳, 한티에 들어왔으니 서당은 커녕 제대로 배운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서당에서 배울 수 있는 명심보감은 배우지 못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께로부터 『요리강령』(그림이 섞인 어린이를 위한 교리책)을 배웠다. 신문지 반장 크기의 두꺼운 그 책에는 천지창조 이야기, 삼위일체, 성모님, 천당지옥 등이 그림과 더불어 설명되어 있었다. 나는 동네 아이들에게 부모님으로부터 들은 대로 그림을 보며 신나게 설명해주곤 했다.

 

고조 할아버지 때에는 화전민과 다름없는 생활을 했지만, 세월이 흘러 박해시대가 지난 후 대대로 개간을 하여 전답도 생겼고 군위 친척집과도 박해때문에 끊겼던 왕래가 다시 시작되고부터 어지간히 살만해졌는데, 그 때 내가 태어났다고 한다. 그 즈음에는 군위 친척 집에서 그간 밀렸던 것을 기워 갚기 위해서 일 년에 쌀 백 석씩 보내왔다고 한다. 그래서 한티 마을의 전부가, 전부라 해봤자 10여 가구의 30여 명밖에 안 되지만 우리 집으로 인해 굶지는 않았다고 들었다. 아버지께서는 무엇보다 동네 사람들이 공소 예절에 빠지지 않도록 더욱 힘을 기울였다고 한다.

 

일 년에 적어도 두서너 번 정도(성탄, 부활) 대구에 나갔었다. 당시 내 기억에 의하면 주교 대 미사 때 어머니한테 안겨서 예절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 때 피우던 향 냄새가 무척 좋았다. 연기를 따라 바라보다가 나무 위의 흰 새가 눈에 띄었는데, 사람들이 지나가도 꼼짝도 안 하고 가만히 있기에, 하도 신기해서 ‘언제 저 새가 날아가나?’하고 그것만 바라보았다. 그 새는 아마도 크리스마스 트리 위에 장식으로 올려놓은 흰 비둘기였던 모양이다.

 

그 긴긴 미사가 끝날 무렵 주교님이 빨간 모자를 쓰는 것을 보고 하도 재미가 있어 깔깔거리며 웃고 말았다. 주위 사람들이 깜짝 놀라 전부 나를 쳐다보며 손가락을 입에 대고 ‘쉿’하며 조용히 하라는 무서운 눈초리로 나를 꾸짖었다. 나는 깜짝 놀라 손바닥을 입에 대면서 웃음을 멈추고 행여 새가 날아갔으면 어쩌나 하고 나무 위를 보았는데, 그 새는 그때까지도 가만히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었다. ‘이상하다, 저 새는 왜 날아가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갑자기 어머니께서 내 손을 잡고 십자성호를 긋기 시작했다. 아마 미사가 끝나고 강복을 받을 때였던 모양이다.

 

한티에서 보는 것이라고는 그저 풀과 나무와 산, 구름과 바위뿐이었던 시골 촌놈이 대구에 나와서 본 거리의 광경은 참으로 희한했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 엄청 크고 많은 집들, 여러 명이 함께 있어도 넓기만 한 길…. 그 길거리에는 구르마(손수레), 자동차, 인력거, 자전거 등등 별별 것이 다 기어다닌다.

 

한티에서 동명(東明) 큰 길까지는 오솔길에서 나뭇가지를 헤쳐가며 2시간 남짓 비탈길을 조심조심 걸어야 한다. 거기서 시외버스를 타곤 했는데, 버스가 없을 때는 마차를 탔다. 그 마차란 것은 독자들이 생각하듯 서부 영화에 나오는 카우보이들이 습격하는 그런 것도 아니고, 독립영화에 나오는 중국 상해거리를 달리던 그런 마차도 아니다. 단지 옛날 흔히 볼 수 있었던 소가 끄는 짐 싣는 수레 비슷한 것으로, 짐 대신 꽃가마 같은 것을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사람이 서로 마주 걸터 앉는 것으로 4∼5명 정도 탈 수 있는 것이다.

 

큰 장(서문 노천시장)까지 반 시간이 넘게 가야 한다. 거기서 내려서는 계산동 주교좌성당까지 또 걸어야 한다. 한티를 떠나 장장 4∼5시간이 걸려서 성당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점심 먹고 떠난 길에 배도 곯고 다리도 아프고 졸리기도 하고 몸은 지칠대로 지쳤지만, 온통 신기한 것이 많아서 양 사방을 보며 두리번거리다 성당에 도달했을 때는 어둠이 깔려 있곤 했었다. 나뭇가지에는 휘황찬란한 형형색색의 전등이 켜지고 사람들이 어쩌면 그렇게도 많은지! 그때만 해도 계산성당에는 의자도 없는 마루였기에 방석을 깔고 방바닥처럼 앉았었다.

 

성당 남쪽 입구를 들어서면 오른쪽에는 지금도 그 옛날 요셉성인의 그림이 있다. 그 유화는 사람들이 모르고 그냥 지나치기 쉽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요셉성인의 그림이 대단한 의미를 준다. 어머니는 한티에서 계산성당까지 자주 오셔서 요셉성인께 아들 하나 낳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다고 한다. 이는 당시 계산동 수녀원 원장이었던 테클라 수녀님께로부터 전해 들었다. 어머니는 나를 낳기 전에 이미 딸만 넷을 낳았다. 자손이 귀했던 우리집은 딸이라고 마다하지 않았지만, 그 시대의 맏며느리로서 아들이 없었다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심정이었을까 짐작이 간다.

 

어머니는 기도 때마다 이렇게 기도를 했다고 한다. “하느님, 아들을 낳게 해 주십시오. 반드시 당신 제단에 제사를 드리는 훌륭한 사제가 되도록 키우겠습니다. 그렇게 당신께 온전히 되돌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요셉성인 앞에서는 “성 요셉이여, 도와주십시오. 나도 당신만 아는 희생을 바치겠습니다.”라고 약속했다고 들었다. 어머니는 기도를 시작하면서부터 그 희생을 평생동안 바쳤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주무실 때 요를 깔지 않고 주무시는 것이었다. 요즘처럼 푹신한 침대 위가 아니라 딱딱한 온돌방에서 요를 깔지 않고 잔다는 것,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이야기는 넷째 누님인 베로니카 수녀로부터 들었다. 나 역시 어머니께서 얼마나 힘드셨을까 하는 생각으로 온돌방에서 요를 깔지 않고 자기도 했다. 그렇게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일구월심 기도와 희생으로 일생을 보내셨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내가 신품예절 중, 제대 앞에 부복(엎드림)하였을 때 특히 어머니의 생각이 난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신품 때의 이야기는 다른 부분에서 다룰 것이다.) -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