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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가르쳐 주는 교리
환대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


전재현(베네딕도)|신부, 대구대교구 사목국 청소년담당

마음열기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있기 마련입니다. 아름다운 첫사랑의 기억은 세월에 묻혀 가슴 설렐 일 없는 이들에게 애틋한 설레임을 되살려 줍니다. 사제에게도 첫사랑은 있습니다. 사제에게 첫사랑은 서품 직후 부임한 첫 본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제서품을 받고 처음으로 함께 살게 된 신자들과의 만남은 평생 동안 지워지지 않는 추억으로 남기 때문입니다. 아마 제게도 첫 본당에 대한 사랑은 평생 갈 것이라 여겨집니다. 엄마 손을 잡고, 때로는 안겨서 어린이 미사에 참여하는 유치부 아이들부터 학생들, 교리교사들, 할머니, 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첫 본당에서의 만남과 추억들은 훗날 메마른 저의 가슴에 순간순간 부드러운 향수와 같은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첫사랑이라는 인류 공통의 경험이 오로지 아름다운 추억으로만 채워질 수 없듯이, 사제들에게도 그것은 때때로 아픔을 수반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사제에게 그 시기는 새로운 환경과 주어진 직분에 적응하고 성숙하기 위해 무척이나 힘겨운 시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기치 못한 사건들에 휘말리고, 양떼를 이끄는 것이 너무나 힘겹게 느껴질 때 새 사제는 성숙을 위한 시간을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제게도 가슴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는 일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일학교 아이들이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성당에 와서는 서로 시기하고 반목하며 끼리끼리 무리 지어 다니는 모습이 큰 아픔으로 기억됩니다. 아이들의 그러한 모습은 성인들의 악한 표양을 반영하는 것 같아 더더욱 저를 안타깝게 했습니다. 기존의 아이들이 서로 아껴주고, 배려해주지 못하다 보니 새로 나온 예비신자 학생들이 그 틈바구니를 끼어 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몇 주 동안 학생 예비자 교리를 듣고도, 기존의 아이들과 동떨어져 미사를 구경하고는 씁쓸히 돌아가는 그들의 모습이 아직도 제 가슴을 아리게 합니다.

 

다소 수동적인 가톨릭의 이러한 분위기와는 달리 아랍인들은 놀라우리만큼 대접을 잘 하는 사람들로 평가받고 있다고 합니다. 부유하건 가난하건, 도시 거주자이거나 사막의 베드윈이건 상관없이 그들은 차별을 두지 않는 예의와 존경으로 손님을 맞이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러한 예의바른 응대와 후한 대접은 사막의 불안정함에서 유래한 것으로 사막의 나그네에게 환영의 손길을 뻗치는 것은 베드윈의 신성한 의무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큰 축복을 내린 것이 그의 지극한 환대 때문이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손님을 후하게 대접하는 것은 이슬람 세계의 어느 곳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미덕이며, 그 장점 때문에 이슬람 신자는 모든 다른 민족, 다른 신자들에게 하나의 모범이 되고 있다고 합니다.

 

각박한 세상에서 무언가 한 줄기 희망을 찾기 위해 성당을 찾는 이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우리 아이들이 성당을 찾는 같은 또래의 아이들을 환대할 줄 안다면 그들이 곧바로 사목자가 아닐까요! 아이들은 본당의 신부님이나 수녀님, 선생님들 이상의 영향을 또래 아이들에게 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하기

본당 공동체가 낯선 이들을 받아들이고 환영하는 것은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본질적인 행동이 됩니다. 교회는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겠다고 모인 너와 나의 ‘모임’이고, 이러한 너와 나의 ‘모임’을 인류 공동체의 ‘모임’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기에, 교회는 폐쇄적인 공동체가 아니며 낯선 이들은 언제나 환영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서에서 관련 구절을 찾아 보았습니다.

“이 말을 듣고 그들도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주님, 주님께서 언제 굶주리고 목마르셨으며, 언제 나그네 되시고 헐벗으셨으며, 또 언제 병드시고 감옥에 갇히셨기에 저희가 모른 체하고 돌보아드리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마태 25,44) 

“성도들의 딱한 사정을 돌봐 주고 나그네를 후히 대접하십시오.”(로마 12,13) 

“나그네 대접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를 대접한 사람도 있었습니다.”(히브 13,2)

“감독자는 오히려 손님 대접을 잘하고 선을 사랑하고 신중하고 올바르고 거룩하고 자기를 억제할 줄 알고, 교회가 가르치는 진실된 말씀을 굳게 지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디도 1,8-9a)

“여러분은 모두 나그네들이니 귀찮게 생각하지 말고 서로 극진히 대접하십시오.”(1베드 4,9) 

 

이렇듯 성서는 나그네 대접을 천사나 예수님을 대하는 것으로까지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일상 생활 안에서 우리를 찾아오는 이들은 고사하고, 성당을 찾는 이들에게까지 우리가 무관심한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분을 철저히 망각한 행동임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주일은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가장 완전한 표현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일에 우리가 하느님을 찾는 모임은 모임 그 자체로 무조건적인 수용과 용서로 하나가 되고, 섬김의 약속을 갱신함으로써 파견될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낯선 이들을 언제나 환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고픈 이들을 먹이시고, 병든 이들을 치유하셨으며, 특별히 진리를 찾기 위해 어둠을 가르고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아낌없는 배려와 존중의 자세를 보여 주셨습니다.(요한 3장 참조) 니고데모가 무엇을 원하는지 예수님께서는 정확히 간파하셨고, 그 필요를 충분히 채워주심으로써 결국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요한 7,50-51;19,39-40 참조) 

 

성인들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아이들은 더더욱 새로운 공동체에 자신이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아니면 그렇지 못한지에 대해 예민합니다. 아직은 신앙 생활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저 호기심이나 단순한 친분으로 성당을 찾았다 하더라도 기존의 구성원들이 자신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에 따라서 신앙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로 인해서 또 우리 자녀들로 인해서 그 누군가가 신앙을 거부하게 된다면 그 책임은 고스란히 우리의 것이 됨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실천하기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요즈음 청소년들뿐 아니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좋아하는 생활성가〈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의 가사입니다. 이 가사가 말해 주는 것처럼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들에게 소중한 사람으로 취급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특히 청소년들은 그들의 첫인상이나 현 상황과는 무관하게 자신들의 잠재력을 인정해 주고, 항상 격려해주는 사람들과 같이 있고 싶어합니다. 상대방이 우리를 정말로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 관계는 더욱 더 견고해지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새 친구를 환대할 수 있습니다. 성당에 새로 나온 친구들에게 격려의 편지를 보낼 수도 있고 기도해 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전화를 하거나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미사나 특별한 프로그램에 참여할 때 안내해 줄 수도 있습니다. 새로 나온 친구에게 미사 시작부터 마칠 때까지 어색해 하지 않도록 안내하고, 다른 친구를 소개시켜주는 우리의 자녀들은 주님의 가르침대로 봉사하고 섬기는 종의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상대방을 위해 그다지 드러나지 않는 일을 행함으로써 우리는 사랑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섬기는 하느님께 찬미를 드릴 수 있습니다. 마치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말입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이런 일들을 권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그리고 그 사랑 전하기 위해 주께서 택하시고 이 땅에 심으셨네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시며...”♬~♬ (제목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시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