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4월 15일 한티 출생,1957년 12월 21일 로마 울바노 대학에서 사제서품, 1971년 계산동 주교좌 성당 주임신부,1979년 광주가톨릭대학 학장, 1993년 대구가톨릭대학교 총장 역임, 1991년 6월 18일 몬시뇰 서임
이 글은 김영환 몬시뇰께서 사제생활 50주년을 앞두고 그동안 살아오면서 부모의 신앙생활이 가정 속에서 자식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그 느낀 바를 진솔하게 풀어낸 이야기이다.
급변하는 물질만능의 시대에서 부모들이 자식에게 보여주는 신앙생활과 그 옛날 몬시뇰 세대의 부모들이 자식에게 보여주었던 신앙생활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지금의 부모들에게 반성할 기회도 주어지는 이야기들을 그 옛날에 느꼈던 신앙과 생활에 대한 이야기들과 비교해서 들려준다.
대구에서 안동 방면으로 가는 그 길은 옛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문경새재를 넘어 서울로 가던 길이었다. 팔달교를 넘어서 칠곡을 지나 좀더 가면, 동명면(東明面)이 나온다. 그 우측으로 송림사(松林寺)로 가는 오솔길이 있고, 계속 가면 저수지가 나오고 고(故) 서정길(세례자 요한) 대주교님이 머무르시던 성심자애수녀원과 양로원이 있으며 그 아래로 길이 있다. 지금부터 내가 할 이야기는 그 저수지도, 양로원도 없던 때의 아주 옛날 이야기이다. 거기서 한참 오솔길을 오르면 기성동이라는 작은 마을이 나오고 그 마을을 지나 개울 따라 계속 꼬불탕길이 이어진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이 아니기에 징검다리도 없어서 개울을 건너려면 그때마다 징검다리를 만들어가며 올라가는 길 끝에 있는 마지막 동네, 그곳이 내가 태어난 한티다.
지금은 산허리를 돌아 오르는 아스팔트길 양편으로 온통 먹자동네가 되어 있다. 옛날에는 한적하고 조용하던 길이 이제는 아스팔트에 자가용이 빈번한 드라이브 코스가 되어 있다. 그 길을 따라 가다 보면 우뚝 선 돌기둥에 ‘한티 순교성지’라 새겨져 있다. 산중에 우뚝 솟은 ‘한티 피정의 집’ 그리고 ‘한티 영성관’이 참으로 장관이다. 영성관 앞에는 그야말로 오래된, 볏짚지붕의 흙벽으로 지어진 옛날 초가집들이 있다. 산 중턱에 자리하기에 주변에는 구름이 감돌고, 풀잎에 맺힌 이슬과 개울이 흐르는 소리, 산새소리에 파묻힌 초가집, 그 중에 ‘한티 공소집’이 있다. 주변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있기에 곳곳에는 울긋불긋 진달래와 개나리꽃이 피고, 마치 죽은 것 같았던 나무에 새 잎이 나는 등 모든 생물이 소생하니 그야말로 한티 골짜기에도 봄이 완연했던 1930년 4월 15일 새벽, 바로 그 공소집에서 내가 태어났단다. 그날 밤엔 유난히 달도 밝았다고 한다. 고조 할아버지는 이미 작고하시고, 증조 할아버지 내외, 할아버지 내외,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누님들이 기다리던 아들이 태어난 그 밤중, 산골 초가삼간에서는 가장 먼저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가 올려졌다고 한다. 비록 가난한 농부의 집이었지만 신앙심이 풍부한 이 가정에 하느님의 축복을 받으며 태어난 것을 나는 자랑으로 삼고 있다.
원래 우리는 충청도 보은에 살았다고 한다. 선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은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 사건과 무관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 한다. 고조 할아버지 집안이 이미 천주교를 신봉했고, 1800년도 충청도 지방에 군란(박해)이 시작되었을 때, 고조 할아버지께서 경북 군위에 있던 친척집으로 피난왔다고 한다. 거기서 사시다가 마지막 경상도 박해 때 다시 야간도주를 하여, 지금의 한티 성지에 피신하였고 그리하여 내가 태어날 때는 이미 나까지 5대째 신자가정을 이루었던 것이다. 나는 한티 개울에서 가재를 잡을 나이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당시 한티 마을은 10여 가구 정도가 있었는데, 10여 가구 모두 신자가정이었다. 아이들도 있었지만, 학교에 다니는 아이는 하나도 없었다. 다만 우리 셋째 누님이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한티에서 걸어서 약 20리도 넘는 곳에 학교(지금의 칠곡초등학교)가 있었다. 그래서 누님이 학교 간다고 꼭두새벽 4시에 아침밥을 먹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마을 사람들은 대개 농사에 종사했었지만, 그나마 땅도 없는 이들은 산에 가서 솔가리를 끌어 모은 후 지게에 지고 칠곡장에 가서 팔아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그때 시대의 보통 다른 산간벽지의 사람들보다 그리 더 잘 살지도, 못 살지도 않은 그런 삶을 살았던 것 같다. 또 기억나는 한티의 특징이라면 뒷산에 밤나무가 참 많았다는 것이다. 가을에 밤을 딸 때 즈음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나와 장대로 나무를 두들기고, 부인들은 광주리에 그 밤들을 주워담기 바빴다. 그리고 지금의 ‘한티 피정의 집’ 계단 밑 부분부터는 계단식 천수답이 저 아래까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그때 들은 이야기이지만, 그 천수답을 전부 다 우리 할아버지들이 이루어놓은 것이라고 한다. 농사 이외에는 별로 가꿀 것도 없었기에 밤나무와 감나무를 많이 심었던 것 같다.
지금 순교자 묘지가 있는 곳에 우리 고조·증조 할아버지 묘지가 있다. 지금은 메워서 특별해 보이지는 않지만 묘지 밑에, 넓이 약 200평 정도의 공지가 있었는데, 옛날에는 거기에 감자를 심었었다. 왜 내가 그것을 특별히 기억하는고 하니, 대구에서 서양신부님들이 우리 공소에 오셨을 때, 항상 김 회장집의 감자를 달라고 했던 기억이 나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나는 감자는 마치 고구마처럼 달고 맛있었다. 훗날 이야기이지만, 아직 ‘한티 피정의 집’이 들어서기 전에 그 동네에 살고 있던 김복신이라는 사람이 그때 그 이야기, 즉 신부님들이 와서 김 회장집 감자 이야기를 했다고 나에게 다시 들려 주었다. 고조·증조 할아버지 묘지 근처에 20∼30구의 무명 치명자 묘가 있는 것을 지금 여러분들은 가 보면 알 것이다. 그 땅이 바로 우리 집 묘답이었다. 고조 할아버지가 묻혀 있는 묘지둘레와 묘답을 모두 교구에 기증했다.
한티에는 봄·가을로 신부님들이 우리 공소집으로 오셔서 봄·가을 판공을 치루었다. 신부님들이 오시면, 동네 사람들이 전부 새 옷으로 갈아입고 공소 방에 모였는데, 신부님은 신자들의 인사를 받았고 이어 대화가 시작되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신자교리시간’이었던 모양이다. 그때 신부님은 책을 들고 있었고, 신자들은 질문을 했었다. 또 때로 신부님이 신자들을 야단도 치고, 칭찬도 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때는 아마 신부님이 교리찰고(교리시험)를 하실 때였던 것 같다. 나는 다만 신부님이 오시면 새 옷을 입는다는 것과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좋았고 그저 재미나게 놀았던 기억이 난다. 봄·가을에 치르는 예절에는 한티에 살던 신자들뿐만 아니라, 인근 한밤 등지에서도 신자들이 많이 모여 들었다. 작은 마을의 그 작은 공소집에 40∼50명이 왁작거렸고 신부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동네는 마치 잔치분위기 같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께 특별한 교육을 받은 것 같다. 다섯 살 내지 여섯 살 때부터 조금만 부모님 말씀을 안 들으면 ‘어떤 성인은 어떻게 살았고, 어떤 성인은 어릴 때부터 부모님 말씀을 잘 들었다.’는 등의 이야기를 어머니로부터 많이 들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이 있다. 아니, 추억이라기 보다도 어느 시점부터 내 목에 걸린 목걸이를 보고 어머니께 ‘이것이 도대체 무엇이며 내가 왜 이것을 걸고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 물었다. 어머니는 ‘너는 베네딕도이고, 목에 걸려 있는 성패는 베네딕도 성인이며, 그 성인은 항상 손에 십자가를 들고 서 있단다. 네가 그 성패를 목에 걸고 있으면 마귀가 근접하지 못 하고, 네가 나쁜 짓을 하지 못하도록 막아줄 것이란다. 그러니까 너는 죽을 때까지 이 목걸이를 걸어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지금 70이 넘은 나이에도 나의 목에는 그 목걸이가 걸려 있다. 학생 때 친구들이 ‘사내자식이 목걸이 했다.’고 웃을 때에도 나는 어머니 말씀을 떠올리면서 먼 산만 쳐다보고 있었다. 새벽에 부모님들의 아침기도 소리에 잠을 깨고, 밥상에서는 꿇어앉아 기도부터 했었고, 자기 전에는 반드시 그 긴긴 저녁기도를 마칠 때까지 꿇어앉아 꾸벅꾸벅 졸기도 했던 생각도 난다.
이렇게 내가 어렸을 때부터 지극했던 어머니의 정성과 신앙이 나에게 전달되었다고 믿고, 지금도 고맙게 생각한다. 또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한없는 기도가 오늘의 내 생활을 지탱해 주는구나, 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지금도 나는 어릴 때 들었던 성인이야기와 성패에 대한 어머니 말씀이 종종 생각난다. 그런 생각이 날 때는 대체로 내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특히 그러하다. -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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