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내 팔자야!’, ‘팔자가 사나워서 그래.’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리고 신자들 중에서도 의외로 사주나 운세를 보는 등 자신의 운명을 알아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사주(四柱), 팔자(八字)란 무엇일까요? 음양오행설에 따르면 이 세상은 하늘에 자리하고 있는 천간(天干)과 땅에 자리하고 있는 지지(地支)의 영향을 받는데, 천간은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甲乙丙丁戊己庚辛壬癸)의 열 가지이고, 지지는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의 열두 가지입니다. 천간과 지지가 결합하여 60조의 간지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갑자, 을축, 병인, 정묘, 무진… 이렇게 이어집니다. 이 이름은 년, 월, 일, 시에 모두 적용 되지요. 예를 들어, 2021년 7월 1일 밤 12시는 신축(辛丑)년, 갑오(甲午)월, 경술(度戌)일, 병자(丙子)시입니다. 그러니까 이날 태어난 사람의 사주(四柱)는 신축(年柱), 갑오(月柱), 경술(日柱), 병자(時柱)가 되는 것입니다. 이 네 개의 기둥(柱)이 그 사람의 사주(四柱)이며, 사주를 구성하는 여덟 개의 글자가 팔자(八字)입니다. 사람이 태어난 연월일시가 정해져 있듯이 사주, 팔자는 한번 정해지면 바뀔 수 없는 것이지요.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게 되는 사주, 팔자에 따라 그 사람의 성격이나 기질이 규정된다고 보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 그 해나 그날의 간지와의 관계를 통해서 그 사람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보는 것이 사주 명리학(命理學)입니다. 흔히 ‘점 보러 가는 일’이지요.
조선시대 위대한 학자이자 임금에 대한 절개를 지킨 충신 가운데 한 사람인 성삼문(成三問)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세종을 도와 집현전 학자로서 한글창제에 공을 세웠지만 단종을 폐위시키고 집권한 수양대군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가 발각되어 비참하게 죽은 사육신(死穴臣)의 대표 인물이지요. 성삼문이 태어날 때의 일화가 있습니다. 산달이 다가오자 어머니는 친정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성삼문의 외할아버지는 사주 명리학에 밝은 학자였나 봅니다. 아기가 태어날 때의 사주팔자가 너무 안 좋아 어떻게든 아이가 태어나는 시간을 늦춰 보려고 했습니다. 외할머니더러 최대한 아기가 늦게 나오도록 막아 보라고 했지요. “이제 낳아도 되나요?” 외할머니가 묻자 외할아버지는 “더 기다리시오.”라고 대답했습니다. 잠시 후에 다시 물었지만 외할아버지는 아직 더 기다리라고 했지요. 세 번째로 물어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나오는 아이를 무작정 막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결국 아이는 태어났고, 세 번 묻고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이름을 ‘삼문(三問)’이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이의 운명을 바꿀 수는 없었는지, 성삼문은 모진 고문을 당한 뒤 온몸을 찢어 죽이는 거열형으로 죽었습니다. 그의 다섯 아들과 동생들도 죽임을 당했고, 처와 딸은 노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삼문의 운명이 자신의 사주, 팔자 때문이었을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성삼문이 자신의 부귀영달을 꾀했다면 세조의 치하에서도 친구 신숙주처럼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매죽헌(梅竹軒)이라는 그의 호처럼 살았습니다. 한겨울에 꽃을 피우는 매화와 굽히지 않는 대나무처럼 임금에 대한 지조를 지키기 위해 죽음과 가문의 몰락이라는 결과도 서슴지 않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성삼문은 자기 앞에 놓인 갈림길에서 불의하고 비겁하지만 편한 길이 아니라, 고달프고 비참한 생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정의롭고 옳은 길을 선택했습니다. 결국 운명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을해는 김대건 신부님의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성인을 비롯한 우리 선조 순교자들의 삶을 돌아보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정말 기구한 ‘팔자’로 비칠 것입니다. 하지만 순교자들의 삶은 그들이 어쩔 수 없이 받아야만 하는 팔자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당국의 회유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참된 신앙의 삶을 증거하기 위하여 스스로 선택한 결과입니다. 우리에게도 변치 않는 사주팔자가 있습니다. 팔자타령만 하면서 주저앉아 있을 것이 아니라 그러한 팔자에 개의치 않고, 어떤 길을 갈 것인지 선택하고, 정한 길을 기쁜 마음으로 열심히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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