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열기
언젠가 텔레비전 광고에서 가정주부와 회사원인 남편 등 몇몇 사람들이 동아줄에 꽁꽁 묶여 있다가 풀려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아마도 어떤 피로회복제에 관한 광고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상품을 팔기 위해서 다소 과장된 그림을 연출했지만, 그 광고에서처럼 우리는 각자의 역할과 책임에 따라 나름대로 긴장 속에 살아가고, 그래서 피로가 누적되는 것을 흔히 체험합니다. 학생들은 수업에서 오는 긴장이 있고, 직장인들은 상사나 동료, 심지어는 부하직원들에게서 요구되는 것들에 긴장하며 살아갑니다. 또 아무리 능숙한 운전자라도 운전 그 자체에서 오는 긴장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 주위에는 다양한 사건과 여러 사람들로부터 스며드는 긴장들이 항상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긴장을 느낀다고 말할 때, 그것은 부정적인 요소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내면을 살펴보면 사람들이 그 긴장을 이해하고 대처하는 방법에 따라 ‘폐쇄적인 긴장’과 ‘개방적인 긴장’이라는 두 가지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일례로 시험 때마다 스스로를 비난하는 학생을 볼 수 있습니다. 시험이 임박해서야 ‘진작부터 시험 공부를 했어야 했는데...’하며 후회하고 자책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학생은 ‘난 아무리 열심히 해도 머리가 나빠서 안돼.’하며 도전해 보지도 않고 미리부터 실망합니다. 이처럼 시험에 대한 두려움과 압박에 사로잡혀 어쩔 수 없이 공부하게 되면 공부가 재미있을 리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긴장 상태는 자신 안에 갇혀버린 ‘폐쇄적인’ 긴장상태가 됩니다.
반면에,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으로 노력하고, 노력한 만큼의 합당한 결과만을 기대할 줄 아는 학생은 긴장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이들은 생활에서 오는 어려움을 자기발전의 기회로 만들어감으로써 그 때의 긴장은 미래에로 열린 개방적인 긴장이 됩니다. 간단한 예이지만 이처럼 긍정적인 긴장 상태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우리 생활이 게을러지는 것을 방지하고, 더욱 활기찬 생활을 위해서 오히려 필요한 스트레스인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은 알게 모르게 다가오는 이러한 스트레스를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하는지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시험이 끝난 후 성적표만 가지고 아이들을 다그치지 말고, 아이들의 스트레스를 부모가 먼저 이해하고 격려함으로써 자녀 스스로 그 긴장을 즐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스트레스를 어떻게 이해하고 관리하느냐는 인격성숙에 있어서도 중요한 문제일 뿐만 아니라 우리 신앙의 성숙도를 가늠하는 하나의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생각하기
스트레스에 대해 서로 다르게 대처하는 모습을 성서에서 찾아보면 단적으로 유다와 예수님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열두 사도 중의 하나였던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 넘긴 죄인으로 유명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지속적으로 느껴지는 긴장은 바로 자신 안에 갇혀버린 폐쇄적인 긴장입니다. 구세주를 있는 그대로 바라 볼 수 없었던 것은 세상의 욕심으로 자신의 눈이 가리워졌기 때문이고 결국 그는 파국으로 치달았습니다. 그래서 유다가 경험한 ‘폐쇄적인’ 긴장은 신앙적으로 볼 때 ‘비구원적인’ 긴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 안에 갇힌 긴장이 비구원을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수많은 긴장 속에서 사셨습니다. 성전에서 상인들의 물건을 뒤집어 엎었을 때나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설전을 벌일 때도 예수님께서 긴장 속에 계셨음을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게세마니에서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하실 때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엄청난 긴장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긴장은 자신 안에 갇힌 ‘폐쇄적인’ 긴장이 아니라,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열어둔 ‘개방적’ 긴장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수난을 예견하셨고, 당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아시면서도, 다시 말해서 신성모독으로 잡혀가 고난을 받고 죽게 됨을 아시면서도,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당당히 걸어가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버지 하느님께 열린 긴장이었고, 그래서 부활과 영생을 가져다 준 ‘구원적인’ 긴장이었습니다. 유다는 ‘비구원적’ 긴장 속에서 파국에로 이르렀지만,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께로 열린 ‘구원적’ 긴장 속에서 부활에 이르신 것입니다. 이밖에도 성서에서 우리는 구원에로 이끄는 긴장상태를 표현하는 구절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지혜를 생각하는 것, 그 자체가 현명의 완성이다. 지혜를 닦으려고 깨어 있는 사람에게서는 모든 근심이 곧 떠날 것이다.”(지혜 6,15)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항상 깨어 있어라.”(마태 25,13)
“예수께서 근심과 번민에 싸여 그들에게 ‘지금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니 너희는 여기 남아서 나와 같이 깨어 있어라.’ 하시고는 조금 더 나아가 땅에 엎드려 기도하셨다.”(마태26,38-39a)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마태 26,41a)
“이런 일들을 제쳐놓고라도 나는 매일같이 여러 교회들에 대한 걱정에 짓눌려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2 고린 11,28)
“잠에서 깨어나라. 죽음에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빛을 비추어 주시리라.”(에페 5, 14b)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인 악마가 으르렁대는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돌아다닙니다.”(1 베드 5,8)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라 온다.”(요한 10,27)
그러나 양이 목자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듯 우리는 얼마나 주님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살아갑니까? 양들은 자신을 인도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긴장하여 그 목소리를 듣고 따라가지 않을 때 어떤 변을 당할지 모릅니다. 길을 잃고 헤맬 수도 있고 그러다 맹수에게 잡혀 먹힐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은 얼마나 주의 깊게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있습니까? 별 생각 없이 성당에 앉아 있기만 한다면, 아이들은 당장 성당을 빠져나가는 순간부터, 세상의 작은 유혹들에 쓰러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들과 함께 목자이신 예수님께 대한 긴장을 다시 한번 다잡아야 하겠습니다.
실천하기
자녀들이 그들에게 결정적인 체험이 다가와 자신을 변화시키기를 기다리며 주일을 막연히 보낸다거나, 그저 일주일간 못 만난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성당을 찾는 데 익숙해져 있다면, 그들의 신앙생활 태도가 변화될 필요가 있음을 부모는 알아야 합니다. 신앙은 친구를 만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되며, 친구들과 함께 하느님도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을 섬기는 것은 학교에서 일주일에 한번 있는 특별활동이나 개인의 취미생활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이 사춘기를 통해 작은 일에 깊이 고민할 줄 아는 것처럼 자녀들에게는 신앙생활에서도 어느 정도 건전한 스트레스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머리를 대면 자르기 좋으냐? 저렇게 머리를 돌리면 자르기가 쉬우냐?”
자기를 죽이려는 휘광이들에게 기꺼이 목을 내어놓고 오히려 그들을 배려하는 순교자들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순교자 성월인 9월에 자녀들의 신앙생활 태도를 다시 한번 점검해 봅시다.
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 자녀들과 함께 진지하게 대화하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또 신앙생활을 더욱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약속을 하나 정해 보면 어떨까요? 예를 들면 ‘매일 아침 정한 시간에 아침 기도를 한다.’, ‘주일 미사 시작 15분전까지 성당에 도착해서 마음의 준비를 한다.’ 등등. 자녀의 약속을 끌어내는 것입니다. 물론, 약속의 이행여부에 따라 상·벌이 따라야겠죠!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루가 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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