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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싶었습니다 - 정은규 시몬 몬시뇰
즐거운 삶


김선자(수산나) 본지기자

바울로 사제관의 아침은 늘 바쁘다. 학교로 방송국으로 특수 사목직을 수행하는 10여 명의 사제들이 이룬 작은 공동체로 언제나 활력이 넘치는 곳이다. 2001년 2월에 은퇴한 정은규(시몬, 71세) 몬시뇰. 출근준비로 북적이는 바울로 사제관의 아침이 좋다하시는 몬시뇰은 40여 년간의 바쁜 사제 생활을 마감한 요즘, 오전 6시에 기상하여 미사를 드리고 7시에 아침식사를 하신 후 두 시간정도 앞산에 오르신다. 그리고 그 동안 시간이 없어 읽지 못 했던 책 등을 읽으며 하루를 보낸다.

구교 집안으로 외가와 친가 모두 열심한 신자의 가정에서 성장한 몬시뇰이 사제가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대구대교구 성지의 산물인 낙산성당과 왜관성당의 종에는 조부의 이름과 조모의 이름이 새겨있을 정도로 하느님의 은혜가 남달랐다.    

 

몬시뇰은 왜관성당의 주임신부였던 고 이기수 몬시뇰의 추천을 받아 부산 영도에 피난해 있던 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라틴어를 배우던 중에 교구장 최덕홍 주교의 명으로 로마 유학길에 올랐다. 그렇게 시작된 유학생활은 1960년 대구대교구 사제로 서품을 받고 난 후에도 10여 년간 계속되었다. “신학부, 법학부 공부를 다 마치고 독일과 미국에서 사목 실습을 했네. 그 후 귀국해 광주 가톨릭대학에서 4년간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신학전망’이라는 잡지를 창간했지. 또 경향잡지와 CCK회보 편집인을 지냈네. 이런 잡지들과도 인연이 깊었지.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본당사목은 한번도 해 보지 못했어.”라는 말씀을 하시는 모습에서 본당사목의 아쉬움을 엿볼 수 있었다.

 

몬시뇰은 근 20년간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CCK)에서 주교회의 사무차장과 사무총장으로 재직하시며 성직자 잡지 ‘사목’을 창간하고, CCK 건물을 신축하고, ‘한국사목연구소’설립과 ‘교회법전’을 번역하시는 데 앞장섰으며, 1988년 직원들의 노조 결성을 허용하여 주 5일 근무제를 도입하는 등 한국교회 발전을 위해 참으로 많은 어려운 일들을 하셨다. “그 모든 일에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있었기에.”라며 하느님의 사랑은 무한하다고 하신다.

 

주교회의 사무총장 임기 만료 후, 10년간 로마에 머물면서 한국교회의 젊은 전문인재 양성기관인 ‘로마 한인신학원’ 설립에 주력하였으며, 신학원 건물 준공과 초대원장으로 있으면서 교황 성하를 모시고 건물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또한 로마에 ‘한국성당’과 ‘한국주교회의 연락사무소’를 병설하여 그 책임자를 겸하였다. 참으로 숨가쁘게 달려온 그 시간들 속에서 행복감을 느끼셨던 몬시뇰은 “내 좌우명이기도 한 요한 1서 4장 8절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씀을 느끼는 시절이었네. 여러모로 부족한 사람이 영예스러운 교회 중책을 맡아 대과없이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하느님의 크신 사랑의 은혜였지. 하느님이 내게 주신 그 많은 은혜에 감사하면서, 그 동안 바빠서 본의 아니게 소홀히 했었던 기도와 희생을 함으로써 남은 여생을 뜻깊게 보내고 싶네.”라고 하신다.

 

몬시뇰은 젊은 사제들과 함께 생활할 수 있는 현재의 시간이 참으로 소중하고 교구 내에서 사목활동을 하지 못했는데도, 따뜻하게 맞아주시는 교구 장상들과 선후배 신부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싶다고 말씀하신다.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라고 할까. 다들 너무 잘 대해주셔서 너무나 감사하네.”라는 몬시뇰은 사목일선에서 물러난 지금, 일에 쫓겨 건강을 소홀히 한 탓인지 건강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라 하신다.

 

지난 삶을 되돌아보며 소일거리를 할 수 있는 현재의 여유로움을 허락해 주심에 감사드리며, 지금 이 작은 바울로 사제관의 공동체 생활이 더욱 즐겁고 행복하다며 말씀을 맺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