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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교회사 연구소 명예소장 故 윤광선(비오) 옹 장례미사 조사(弔辭)
한 평생 평신도사도직 활동에 몸바친 삶


마백락(클레멘스)|영남교회사 연구소 부소장

지난 7월 26일 별세한 故 윤광선 비오 선생님은 1915년 경남 문산에서  부친 윤창두 요셉 옹과 모친 장학순 수산나 여사 사이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부친께서 1914년 설립된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의 교사로 임명되면서 부친을 따라 온 가족이 대구로 이사하였습니다. 해성보통학교에 다니던 시절, 1926년 남산성당이 설립되면서 첫 미사 복사반으로 뽑혀서 김달호, 김경우 소년들과 함께 주일과 평일 미사에 열심히 복사를 섰습니다. 어릴적 선생님의 꿈은 신학교에 진학하여 훌륭한 사제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건강상의 이유로 사제의 꿈을 접고 1939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전문부의 제도전문과를 마치고 1942년 귀국하여 11월 오랫동안 휴면상태에 있던 계산성당 청년회를 활성화 할 목적으로 우선 성가대를 조직하고 단장 최재복과 정태호, 한성준, 송필수, 윤광선 등이 활동하여 교회 전례 봉사를 했습니다. 1946년 5월 대구가톨릭 청년회, 1948년 9월 대구교구 가톨릭 청년연합회 결성에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이어 1949년 1월 15일 청년연합회 긴급 임시 총회에서는 1927년 4월 1일 창간 후 일시 휴간되었던 ‘천주교 회보’(현재 ‘가톨릭 신문’)의 복간 결정에 따라, 1949년 4월 1일 복간 때 청년연합회 임원으로 편집국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 후 1962년까지 13년 동안 선생님은 혼신의 힘을 기울여 동분서주하면서 신문 발행을 위하여 노력했습니다.

 

1953년 한국에 처음 도입된 강력한 평신도사도직 선교단체인 레지오마리에가 당시 계산성당 주임신부인 최재선 신부의 배려로, 1957년 2월 4일 ‘다윗의 적루’ 쁘레시디움이 첫 회합을 가질 때 단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 후 1958년 2월 대구교구 의덕의 거울 꾸리아 단장, 1959년 2월 대구교구 의덕의 거울 꼬미시움 단장을 역임하면서 20년 동안 교구 레지오 발전을 위해서 온 힘을 쏟았습니다. 윤 비오 선생님은 1966년 병인박해 100주년을 맞아 우리 한국교회가 24위 순교자 시복운동때 대구교구에서는 신천동 복자성당을 건립하게 됨에 따라 성전건립기성회에 참가하여 1969년 성전공사를 마무리 할 때까지 많은 수고를 하셨습니다.

 

그 후 1991년 을해박해(1815년)를 비롯한 역대 박해 때마다 많은 순교자들이 순교한 관덕정 순교기념관 건립과 영남교회사 연구소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선생님께서는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초대 소장에 선임, 직접 회보 발간 등 많은 수고를 하셨습니다. 1997년 을해박해, 정해박해, 병인박해 순교자 23위의 시복시성을 위해서 대구대교구 순교자 현양위원회를 창립할 때는 선생님을 고문으로 추대하였습니다. 아흔을 바라보는 높은 연세였지만 젊은이들 못지 않은 열정으로 각종 회합과 세미나 등에 참석하셨습니다.

 

이렇듯 윤 비오 선생님은 한 평생을 우리 대구대교구 평신도사도직 활동에 크게 공헌하신 공로자이시며, 아울러 우리 후학들에게 평신도의 모범적인 삶을 보여주신 참 실천가이십니다. 온화한 성품과 열심한 기도생활 그리고 끊임없이 노력하여 교회사 연구와 집필, 어렵고 가난한 가운데서도 늘 웃으시면서 인내하시던 모습은 참으로 훌륭한 모범이었습니다.

 

선생님의 삶은 이 시대의 학문과 행동이 일치하는 진정한 실천가요, 가난한 선비의 삶이었습니다. 또한 자기의 무거운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열심히 예수님 뒤를 쫓아가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었습니다.

 

선생님, 부디 하느님을 모시고 영광전에서 편히 계시면서 후손들뿐 아니라 우리 교회 특히 교구 평신도사도직의 발전을 위해 귀한 전달자가 되어주십시오.

7월 29일 마백락 클레멘스 삼가 올림

-장례미사 <조사>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