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문을 열면 저만치 터져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물고기처럼 파닥파닥 가슴에 저려 온다. 내가 자란 산골마을의 겨울은 유난히 밤이 길었다. 별빛이 마구 쏟아져 내릴 듯할 때가 있는가 하면 초승달이 소리 없이 지키고 있기도 하는 밤이었다. 마을은 백열등 몇 개를 매달아 올렸지만 그 빛이래야 겨우 어슴푸레 길이나 비출 뿐이었다. 황량한 바람이 골목을 쓸고 다니면서 대숲에서는 으스스한 소리가 났었다.
어둠이 지배하는 그 속에서도 또래들에게는 자별난 일이 많았다. 할매 묵집 사랑방에 모인 아이들에게 재미있는 일이란 재수를 놀리는 것이었다. 재수 없이 놀면 재수가 없다고 하면서도, 재수랑 놀면 어떻게든 골려먹는 재미가 많아서 재수는 어찌 보면 약방의 감초 같은 아이였다.
그 날도 기도의 효험을 시험하자고 대길이가 나섰다. 찬물을 앞에 놓고 눈감고 기도를 하면 찬물이 포도주로 바뀐다고 한 대길이는 모두 앞에 물그릇을 놓았다. 그리고 대길이와 병수가 모두에게 눈을 감게 하고 각자의 그릇에 물을 채웠다. 절대로 물을 보면서 의심을 하면 안 된다고 눈을 감은 채로 기도를 하고 곧장 물을 먹기로 한 것이었다.
모두 따라주는 물을 두고 손을 모았다. 무슨 기적을 바라듯이 고사리 손을 모으고 나름대로 기도를 하였다. 그리고 앞에 놓인 물을 의심 없이 마셨다. 물을 거의 다 먹을 때쯤 대길이가 갑자기 “그만!”하고는 서로의 물을 확인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유독 재수의 물이 노랗게 변하여 있었다. 모두 난리가 났다. 재수의 물이 노랗게 변했다고…. 그날 오줌을 먹은 재수는 그래도 대길이나 병수를 욕하지 않았다. 토해 내거나 울고불고 하지도 않았다. 그런 아이가 재수였다.
어둠이 깊을 대로 깊어 밤이 이슥해지면 배고픈 아이들은 남의 집 무를 내다 먹기로 하였다. 무섭기로 이름난 억대 할배네 무 구덩이는 사람 한 길이나 될 정도로 아주 깊고 컸다. 거기 빠지면 혼자 힘으로 나오기도 어려운 큰 무 구덩이다. 텃밭에 늠름하게 자리 잡은 무 구덩이는 먹을 테면 먹어봐라, 억대 할배가 가만 두지 않을 거라고 외치는 듯하였다.
콩콩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컴컴한 어둠을 짚어 무 구덩이에 갔지만 이미 많이 내어 먹은 구덩이는 손이 닿지 않을 만큼 깊었다. 누군가 그 안에 들어가서 무를 내든지 아니면 두 발을 잡아주고 아이를 밀어 넣어 무를 잡으면 끌어내야 한다. 당연히 키가 작고 호리호리한 재수를 밀어 넣고 무를 잡아내게 하였다. 무가 한두 번이나 나왔을까 할 때에 대길이가 “억대다!” 고함을 질렀다. 그 소리에 이어서 벼락같은 억대 할배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재수를 그냥 무 구덩이에 밀쳐 넣고 고망쥐처럼 뺑소니를 칠 적엔 동네 개들도 요란스레 짖어댔다. 조용한 마을에 잠시 소란이 벌어지고 난 후 콩닥거리는 가슴을 진정하고 모두 묵집 할매의 사랑방에 모인 것은 한 시경이나 지난 후였다. 그런데 재수가 없다. 아직도 오지 않는다. 걱정이 된다. 설마 오겠지, 아니면 그냥 집에 갔겠지. 걱정에 서로 의견이 분분하다가 무 구덩이에 다시 가 보기로 하였다. 그래도 재수를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었다.
두 번째 갈 때는 어둠에 익숙한 채로 무서움이 덜했다. 짚으로 만든 무 구덩이 구멍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니 컴컴한 그 속에서 재수의 손이 쏘옥 올라오지 않은가! 무덤에서 끄집어낸 듯한 재수는 덜덜 떨고 있었다. 또래들은 다시 묵집으로 가지 않고 들판으로 나가 짚단을 모아 불을 피웠다.
구덩이에서 오들오들 떨면서 억대 할배가 와서 고함을 지르고 구멍을 막을 때까지 가만히 있다가 나중에는 혼자 힘으로 나올 수가 없어 그 안에 갇혀 있었으면서도 잘 참아 낸 재수가 대견스러웠다. 고맙기도 했다. 불빛이 이글거리는 가운데에 눈을 내리깔고 천연덕스럽게 불을 쬐고 있는 재수 앞으로 대길이가 다가갔다.
“미안하다, 재수야!”
또다시 12월이다. 혹독한 추위에도 아랑곳 않고 청청한 잎으로 빨간 열매를 달고 겨울을 나는 노간주나무가 생각난다. 그렇게도 왕따를 당하고 창피를 받으면서도 우리를 위해 그 추위 속에서 참아 준 재수가 우리 옆에 있다. 무덤과 같은 그 속에서도 우리들이 다시 그곳에 올 거라는 긍정적인 믿음으로 우리를 지켰던 재수가 노간주 빨간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겨울 한복판을 지키고 서 있다.
용서와 희생으로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준 재수의 고마움을 알게 된 때가 성탄의 종소리가 바알갛게 산천을 물들이며, 은은히 울려 퍼지던 계절이었다. 가슴에 눈발 흩날리는 날, 재수를 생각하며 마음속 깊은 정원에 나도 빨간 열매를 단 노간주나무 한그루 심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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