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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싶었습니다-은퇴사제를 찾아서 / 허연구 모이세 신부
행복한 삶


김선자(수산나) 본지기자

시원하게 내리꽂는 빗줄기에 지상의 모든 만물이 푸르름과 싱그러움으로 빛나고 있다. 경북 고령, 산새가 우거져 구불구불거리는 도로를 따라 20여분 정도 더 들어간 후에야 월막 피정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예수님의 성상이 팔을 벌리고 있어 오는 이들로 하여금 푸근함을 느끼게 하는 곳. 그날은 물먹은 땅에 몇몇 사람들이 나무를 심고 있었다. 어느 쪽으로 가야할지 갈팡질팡하고 있는 기자에게 작업복 차림에 비를 맞아 흠뻑 젖은 노인 한 분이 와서 말을 건넨다.

 

“빛잡지에서 오셨소?”, “네, 혹시 허연구 신부님...” 고개를 끄덕이시고는 하얀 치아를 가지런히 드러내 보이며 환한 웃음으로 자신이 허연구 모이세 신부라고 소개를 한다.

 

피정이 없는 날이면 인부들과 함께 직접 팔을 걷어 부치고 일을 하신다는 신부님. 그래서인지 연세에 비해 훨씬 더 건강해 보이셨다. 흰색 건물의 세련된 성당과 식당, 일반 피정인들을 위한 숙소 등을 손수 안내하시며 설명을 해 주시는 신부님의 말씀과 행동에서 월막피정의 집에 대한 강한 애착심과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엿볼 수 있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포기해야 했던 허연구(모이세, 66세) 신부님은 19세 되던 해, 중학교 3학년 과정을 시작으로 다시 책을 펼치셨다. 어떠한 일을 하든지 공부에 대한 미련 때문에 한쪽 가슴이 묵직했던 신부님은 그제서야 속이 뚫리는 기분을 느끼셨단다.

 

사촌누이의 적극적인 믿음으로 신부님은 1948년 ‘모이세, 사람들이 모이다.’라는 신부님의 말씀처럼 모이세 성인의 세례명으로 첫영성체를 하여 하느님과 만나게 된다. 주일을 거룩히 지키고, 고등학교 때부터는 복사도 서면서, 하느님께 다가가는 시간이 많아질 무렵 신부님의 마음속에 꿈틀거리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수도자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왜관의 한 수도회에 입회를 원했던 신부님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거절당하셨단다.

 

갑자기 사라져버린 꿈 때문에 참으로 많이 힘들고 혼란스러운 시기에 허연구 신부님이 다니셨던 성당의 전말구 주임 신부님은 “신부가 되는 건 어때? 꼭 수도회에서만 하느님 말씀따라 살 수 있는 게 아니라, 다른 곳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길들이 얼마나 많은데...”라고 충고해 주셨다. 전 신부님의 말씀이 신부님의 가슴에 못처럼 꼭꼭 박혀왔다. 그리하여 더 열심히 공부하고 기도하면 답은 하느님께서 내려 주실거라는 굳센 믿음으로 열심히 노력했다.

 

정의구현 사제단, 농민화(효소농법), 가창 청소년 교육원 등등 신부님 뒤에 붙어 다니는 수식어는 참으로 많다. 하지만 신부님은 그 모든 것에 함께 한 일꾼이었으며, 하느님이 하신 일들이라고 말씀하신다. ‘자신을 알라.’ ‘자신의 일에 충실하자.’ ‘떠나야 할 때를 알아라.’ 사제가 된 순간, 아니 사제가 돼야겠다는 결심을 했을 때 늘 마음속에 간직한 이 말들은 신부님이 하느님께 드리는 약속이었다.

 

본당 사목활동을 하실 때나 특수 사목활동을 하실 때도 늘 신부님을 따라다닌 것은 ‘솔선수범’이라는 말이었다. “보좌신부로 있을 때 박상태 신부님이 하신 말씀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네. ‘첫 번째는 후배가 선배보다 똑똑해야 한다. 그래야 선배가 잘 된다. 두 번째는 모든 일에 소신껏 해라. 모든 책임은 주임신부에게 맡겨라.’라고 말씀하셨지. 그 말씀이 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어. 내가 어떤 일들을 할 때마다 늘 따라 다녔고, 내가 선배가 됐을 때 나도 모르게 그 기준에 맞추려 애쓰는 나를 봤으니까.”라며 사제생활 내내 그 말씀이 떠나질 않았다고 하신다.

 

허연구 신부님은 2000년 2월부터 월막 피정의 집에서 생활하고 계신다. 이 곳에 오신 지 어느덧 2년이 훌쩍 지나가 버린 지금, 신부님은 단체 및 개인 피정객들을 위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계신다.

 

한 그루의 나무를 선택할 때도 정성으로 고르시고, 보고 아름다운 나무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깨달음의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나무, 과실수 같은 것을 선택한다. 신부님은 “지금은 저렇게 혼자서는 서 있을 수 없지만, 시간이 좀더 흘러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고, 무럭무럭 자란다면 이 곳을 찾는 피정객들에게 시원한 그늘과 달콤한 맛을 줄 걸세.”하고 말씀하신다.

 

신부님의 땀방울과 사랑이 나무에게 영양분을 주어, 먼 훗날 이 곳을 찾는 사람들의 가장 큰 즐거움이 될 것이고 또한 하느님 말씀 안에서 우리 자신을 뒤돌아볼 수 있는 쉼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