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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시절
교회 기록의 제주 민란 전말顚末


윤광선 (비오). 영남교회사연구소 명예소장

천주교 전파와 제주도민의 반응

봄에 우리는 2년 간의 전교로 얻은 성과(영세자 242명, 예비신자 6-7백여 명)를 보며 기쁨과 희망에 차 있었습니다.…(중략) 제주도 주민들은 아직도 반야만인이며, 대단히 미신적입니다. 자기들끼리 조합을 이루는 무당들이 대단한 세력을 가지고 온 섬 안에 퍼져 있습니다. 수많은 옛 고객들이 천주교로 넘어가는 것을 보고, 이들은 우리를 주민들로부터 인심을 잃게 하려고 갖은 모함을 다했습니다. 이들은 우리가 어린애 눈을 뺀다느니 시체의 골수를 빨아 먹는다는 등의 모함을 했습니다. 어느 지역에서나 허무맹랑한 소문이 똑같이 나온다는 것은 그 악의적인 출처를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문란한 세금제도

최근까지 제주도는 조정에 정규적인 세금을 바치지 않았습니다. 감사와 군수들이 마음대로 꽤 무거운 세금을 거두어, 자기 지위의 보전을 위하여 서울에는 필요한 액수만 보내고 나머지는 모두 자기 주머니에 넣거나 수하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가졌습니다. 그러다가 2년 전부터 조정에서 세금 징수원이 파견되었습니다. 따라서 관장들과 관속들 수입의 대부분이 없어졌습니다. 그들은 세금 징수원을 몰락시켜 소환 당하게 하려고 온갖 중상모략을 다했습니다. 결국 주민을 충동질하여 세금이 과다하다는 핑계로 들고 일어나게 했습니다.

 

이 폭동의 도구가 된 것은 대정(大靜) 군수가 창설한, 그 우두머리 역할을 하는 소위 상업조합 같은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폭동은 이 지역에서 시작되어 차차 섬 전체에 퍼졌습니다.

5월 초순에는 폭동이 어찌나 격렬해졌는지, 세금 징수원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첫 번째 선편으로 서둘러 떠났습니다. 그러니 폭동의 공적인 목표가 사라진 셈입니다. 그러나 폭동은 일으키기는 쉬워도 평정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공격의 화살을 천주교로 돌려

주민들은 본인이 앞서 말한 허무맹랑한 중상모략에 흥분하여 자연히 천주교 신자들에게 공격의 화살을 돌렸습니다. 사방에서 신자들을 추격하자 신자들은 제주시로 피난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5월 10일 피정에서 돌아오던 라크루 신부와 무세 신부는 배에서 내리자마자, 제주의 사제관이 피난 온 신자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신부들은 그들에게 집에 돌아가도록 설득했으나 불가능했습니다. 길을 가다가 학살되느니 죽더라도 차라리 선교사 옆에서 함께 죽는 편이 낫겠다고 했습니다.

 

애매한 군수와 관장

얼마 후 도시는 폭도들에게 포위되어 방어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부득이 필요에 의해 선교사들은 성문을 닫게 하고 자위대를 조직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갇힌 군수와 2명의 부군수가 돕기만 했다면 구원병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약해서인지 아니면 공모를 했는지 몰라도 이 관장들은 외부의 적과 타협하고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신자들과 한편이 되었던 외교인들의 용기를 꺾어 버렸습니다.

 

성문을 열어 준 여자들

5월 28일 미친듯이 소리치는 한 무리의 여자들이 성문이 열렸다고 외치며 거리를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양쪽에서 동시에 폭도들이 성내로 쏟아져 들어오더니 무자비하게 신자들을 학살했습니다. 신자들은 저항도 못하고, 목이 잘리고 맞아 쓰러졌습니다. 이러는 동안 두 신부는 관아로 피신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곳도 안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들도 차례로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들을 구하기 위해 포티에(Pottier) 제독이 보낸 프랑스 군함 쉬르프리즈(Surprise)호와 알루에트(Alouette)호가 아니었더라면, 그들도 틀림없이 학살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구조된 것은 5월 31일이었습니다.

 

이틀만 빨랐어도 이 엄청난 학살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주와 섬 전체에서 학살된 신입교우들과 예비신자들이 5-6백 명은 될 것으로 추산됩니다.(이하생략) - 1901년 말 파리외방 전교회에 보낸 보고서에서 -

 

서울의 대책일지(日誌)

1901년 4월 22∼28일 개최되는 조선교구 사제 연례피정에 참석하기 위해 제주도의 라크루 신부와 김원영 신부는 제주를 출발, 목포에서 데사예(조) 신부와 함께 배로 4월 19일 제물포(인천)에 상륙하였다. 22일에 시작된 피정에는 당시 조선에 있던 선교사 38명이 참석하고 27일에는 사제 인사이동이 발표되었는데, 제주도 한논(大畓)본당의 김원영 신부가 전임되고 후임에 제르만 무세(文濟萬) 신부가 임명되었다.

 

피정을 마친 라크루(구) 신부는 조선에 와서 처음으로 임지에 부임하는 무세 신부를 데리고 5월 10일 제주에 도착했다. 그러나 제주에선 폭동이 일어났으므로 위급한 상황을 알리는 짤막한 편지를 급히 부산의 로우(盧若望) 신부에게 보냈고, 로우(盧) 신부는 5월 13일 긴급 전보로 뮈텔 주교에게 알렸다.

 

“제주도에 반란. 교우들은 맞고 투옥되었으며, 마을은 파괴되고 신부들은 현유신(Hyen You Sin) 때문에 위험에 처함.” 같은 날 또 목포에서 친 전보가 도착했는데, “제주도 대정(大靜) 군수는 그의 권한으로 상무사원(商務社員)들을 소집하고 폭동을 유발하게 했음. 교우들은 가혹하게 두들겨 맞았음. 신부댁을 파괴하려 함. 학살이 일어날 것임. 속히 우리를 구해주시기 바람.”

 

뮈텔(민) 주교는 이때 용산에 있던 김원영 신부를 프랑스 공사(公使)에게 전보문을 전하게 하고, 프랑스 공사는 조선정부의 외무대신을 만나게 하였다. 5월 16일 프랑스 공사가 제주 폭동에 관한 외무대신의 회답을 가지고 주교를 방문했는데, 조선 정부는 목포의 감리에게 전보로 신부들을 보호하고 질서를 회복하도록 경관을 제주도에 보내라고 지시하였던 것이다. 5월 22일 서천 출신의 신임 제주 목사 이재호가 뮈텔(민) 주교를 방문했는데, 신임 제주 목사는 “경관의 파견은 소용없기 때문에 시행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5월 26일은 성령 강림 대축일이었다.

 

프랑스 군함 제물포 도착

5월 27일 오후 프랑스 군함 알루에트 호가 제물포에 도착하여 프랑스 공사의 지시를 기다리게 되었다. 5월 28일 11시 목포의 데사예(조) 신부가 친 전보가 왔는데, “오늘 라크루 신부와 무세 신부의 편지, 신부와 교우들은 읍내에서 포위중. 교우들은 학살됨. 식량부족. 전체적인 학살임박. 신속한 대항. 배와 군사. 회답요망.”

 

이 전보문을 서둘러 제물포에 있는 프랑스 군함으로 보내고 주교는 목포의 데사예 신부에게 포아넬(朴道行) 교구경리 신부가 프랑스 군함편으로 오늘 제주도로 떠난다고 전보를 쳤는데, 알루에트 호는 석탄을 싣기 위해 이 날 못 떠나고 29일 아침 8시에 출발하였다. 또 28일에는 데사예(조) 신부가 보낸 전보보다 더 불안한 전보가 프랑스 공사에게 전달되었는데, “오늘 라크루, 무세 두 신부의 증언 편지. 6명의 교우 사살. 많은 교우 치명적 부상. 관장은 반도들과 같이 출발. 그들을 옹호. 신부들은 절박한 위험. 보호군함. 회신요망.”

 

6월 1일 오후 목포 데사예(조) 신부의 편지가 도착했는데 라크루, 무세 두 신부가 5월 30일에 쓴 짤막한 편지를 동봉하여 보내왔다. 6월 2일 제주도에서는 여전히 아무 소식이 없다고 공사에게 주교의 불안함을 말했더니, 공사는 “만일 신부들에게 불행이 닥치면 즉시 소식을 전하도록 알루에트 호에 당부했기 때문에 소식이 늦은 것은 오히려 좋은 일 같다.”고 주교를 안심시켰다.

 

6월 3일 프랑스 공사는 뮈텔 주교에게 제주도의 두 선교사들이 무사하며 포함(砲艦)의 출현으로 학살이 중단되었다고 알렸다. 6월 4일 군함 편으로 제주도로 갔던 포아넬(박) 신부가 돌아왔다. 신부들은 무사하다. 그러나 슬프게도 거의 모든 교우들은 학살되었다.

 

라크루, 무세 두 신부의 구출

5월 30일 제주 앞 바다에 도착한 쉬르프리즈 호는 육지와는 접촉하지 않고 알루에트 호를 기다리면서 섬을 따라 바람을 거슬러 항해했는데, 알루에트 호는 안개 때문에 먼 바다로 나가야 했다. 그래서 금요일인 31일에야 제주도에 도착하였다. 라크루(구) 신부와 무세(문) 신부는 쉬르프리즈 호의 소형 보트가 해변에 도착했을 때 성벽을 넘어 해변에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몹시 지쳐 있었으나 배까지 무사히 왔다. 그들은 반란군에 의해 황폐화 되고 일부 약탈 당한 그들의 집을 며칠 전부터 떠나야 했다.(뮈텔 주교 일기에서 발췌)

 

5월 31일 포와넬(박) 신부와 쉬르프리즈 호의 마르네(Marne) 함장은 신임 제주 목사 이재호와 함께 상륙하면서 아직 광장에 버려진 시체 68구를 발견했다. 포아넬(박) 신부는 제주 목사의 사기를 북돋우고 또 위협까지 하면서 엄격한 포고(布告)를 발표하고 학살당한 시체를 매장하도록 해야 했다. 그러자 목사는 제주에서만 최소한 150명이 있다고 선언했다. 제주의 두 신부와 함께 관청으로 피신했던 신부들의 하인은 대정 군수의 경솔함으로 반도들에게 넘겨졌고, 반도들은 하인들을 체포하여 학살·순교시켰던 것이다.

 

마르네 함장은 목사로부터 학살당한 시체를 매장하기 위해 땅을 양도받았고, 라크루(구) 신부가 장례예식을 집전하고, 이 장례식에 목사도 참석한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군함이 떠나기 전에 시행되지 못했다.

 

6월 9일(일요일) 조선 정부가 군대를 제주도에 실어 나르기 위해 세를 낸 자오조푸(Taotiyofou) 호가 강화(江華) 군사 200명을 태워 아침에 제주도에 도착하였다. 자오조푸 호는 즉시 떠나고, 그 전날 밤에는 상륙한 프랑스 해병들이 관청을 지켰는데 조선 군사들이 도착하자, 그들은 관청의 감시를 조선 군사들에게 넘기고 떠났다.

 

제르만 무세(문) 신부는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살아 남은 교우 40명과 함께 알루에트 호 편으로 목포에 도착하여 목포본당에서 몇 개월을 거처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