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로그인

어머니가 가르쳐 주는 교리
아름다운 말하기 = 말씀이신 예수님 닮기


전재현(베네딕도)|신부, 대구대교구청 사목국 청소년담당

마음열기

“욕지거리, 황당한 조어 ‘난무’ - 청소년 인터넷 언어 위험수위.”

 

얼마 전 어느 신문에서 본 기사의 제목입니다. 쉬운 예를 몇 가지 들어보겠습니다.

“안냐세요, 넘넘 궁그매요, 갈쳐쥬스…생일 추카추카, 고롬 20000 안냐게세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이것은 “안녕하세요, 너무너무 궁금해요, 가르쳐 주세요…생일 축하축하, 그럼 이만 안녕히 계세요.”라는 표현입니다. 청소년 네티즌들의 대화는 이렇게 황당한 조어와 변칙적인 언어들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대학생들조차 중·고등학생들의 이런 언어를 이해하지 못할 지경이라고 하니, 세대간의 의사소통 문제는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또 웬만한 초등학생들도 인터넷을 이용하고 있는 우리 나라의 상황을 감안할 때, 이같은 현상은 바른 언어습관을 무너뜨리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지 않을까요.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변칙적인 언어사용은 인터넷의 익명성으로 말미암아 폭력적인 것이 더해지고, 타인에 대한 욕설과 비방이 도를 지나칠 정도입니다. 아무도 보지 않으니 무슨 짓인들 못하겠느냐는 식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방은 무조건 저주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반 달덩이 그 ×발년 졌나 짱나, 대갈빡도 드럽게 큰 게... 그 ×같은 옘병할 년... 썩 꺼져벼려, 이 ×냥년아.”

 

어느 중학교 학생들이 개설한 대화방에서의 대화 내용입니다.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입니다.

 

실생활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형편입니다. 언제나 예쁠 것만 같은 우리 아이들이 친구를 배척하고 비꼬고 무시하는 말을 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이렇게 예쁜 아이들에게서 어떻게 저런 나쁜 말들이 나올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아예 거칠고 나쁜 언어습관에 젖어있는 아이들을 볼 때면 슬픈 마음까지 들곤 합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상대방이 그런 뜻으로 말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상대방의 말, 어투에 이끌려 그만 공격적인 말을 해버릴 때가 있습니다. 이런 뜻에서 바른 말, 고운 말에 익숙한 아이는 친구를 사귀기가 쉽고, 진학이나 생활환경의 변화 등으로 인한 새로운 공동체에 적응하는 것에도 어려움을 덜 느낍니다. 마찬가지로 아이들이 주일학교에서 잘 어울리지 못하면, 하느님과의 관계도 소원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아이들의 언어습관에 좀더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생각하기

말은 곧 인격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씨는 곧 그 사람의 인품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인격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가정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들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가정에서 사용하는 언어 모델이 좋으면 자녀들의 성격형성이나 올바른 가치관 확립에 도움이 되어 건전한 인격으로 성장해 가지만, 언어모델이 옳지 않을 때에는 이와는 반대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일상 생활에서 주고받는 말은 이렇듯 아이들의 인격 형성에 꽤 큰 몫을 차지합니다.

 

철학자 하이덱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의 말과 행동은 인격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사람됨을 알 수 있다고 하십니다.

 

“이 독사의 족속들아! 그렇게 악하면서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겠느냐? 결국 마음에 가득 찬 것이 입으로 나오는 법이다...잘 들어라. 심판 날이 오면 자기가 지껄인 터무니없는 말을 낱낱이 해명해야 될 것이다. 네가 한 말에 따라서 너는 옳은 사람으로 인정받게도 되고 죄인으로 판결받게도 될 것이다.”(마태 12, 34-37)

이밖에도 신·구약성서 안에서 말과 인격의 연관성에 대한 가르침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성서의 가르침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함부로 뱉는 말은 비수가 되지만 슬기로운 사람의 혀는 남의 아픔을 낫게 한다.”(잠언 12, 18) 

“부드럽게 받는 말은 화를 가라앉히고 거친 말은 노여움을 일으킨다.”

(잠언 15, 1)

“따뜻한 말은 생명의 나무가 되고 가시돋힌 말은 마음을 상하게 한다.”(잠언 15, 4)

“다정스러운 말은 꿀송이 같아 입에는 달고 몸에는 생기를 준다.”

(잠언 16, 24)

“부드러운 말은 친구를 많이 만들고 상냥한 말은 친구들을 정답게 한다.”(집회 6, 5)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은 누구나 재판을 받아야 하며 자기 형제를 가리켜 바보라고 욕하는 사람은 중앙법정에 넘겨질 것이다. 또 자기 형제더러 미친놈이라고 하는 사람은 불붙는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마태 5, 22)

“남을 해치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마십시오. 오히려 기회 있는 대로 남에게 이로운 말을 하여 도움을 주고 듣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도록 하십시오.”(에페 4, 29)

“말은 입에 재갈을 물려야 고분고분해집니다. 그래야 그 말을 마음대로 부릴 수가 있습니다.”(야고 3, 3)

 

우리 아이들이 어떤 말을 자주 사용하는지 주의깊게 관찰해 보세요. “잘 해봐라.”는 비꼬는 말, “난 몰라.”라는 책임없는 말, “네가 뭘 아느냐?”는 무시의 말, “이 정도면 괜찮다.”는 타협의 말, “다음에 하자.”고 미루는 말, “해보나 마나 똑같다.”는  포기의 말을 우리 아이가 습관처럼 사용하고 있다면 큰일입니다. 이런 말들은 아이의 성장과 건전한 성숙을 방해할 것이 너무나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하루 속히 이런 말들을 버리고, “예, 알겠습니다.”하는 순종의 말, “제가 하겠습니다.”는 자원의 말, “고맙습니다.”는 감사의 말, 이런 말들이 아이의 언어습관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부모는 신경써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말하기를 인격 형성 차원에서 받아들여 생활화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제일 먼저 건넨 말은 바로 위로의 말, 축복의 말이었습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루가 24, 36 : 요한 20, 19)

 

모든 희망을 잃고, 유다인들이 무서워 문을 닫아걸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이 바로 위로자의 역할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위로자의 사명을 택하셨다면, 세례로서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 태어난 우리 또한 서로 서로에게 위로자가 되어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실천하기

하느님께서는 ‘말씀’으로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어서 그것이 현실로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하시자 실제로 빛이 생겨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말에도 능력이 있습니다. 부주의한 말 한마디가 다툼의 불씨가 되고 즐거운 말, 사랑의 말 한마디가 삶의 활력을 되찾아 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미사 중에 나누는 ‘평화의 인사’는 그저 하나의 형식이 아님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내가 전하는 축복의 말을 통해 하느님의 축복이 이웃에게 실제로 내려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부모는 아이에게 대화를 통해 가르쳐주고, 부모가 먼저 진지한 모습으로 모범을 보여야 하겠습니다. 또한 아이가 등교하기 전, 아빠가 출근하기 전 서로에게 축복을 빌어주는 것도 좋겠지요. 축복의 말과 더불어 안수하거나 이마에 작은 십자가를 하나 그어준다면 아이는 더 기뻐할 것입니다. 먼저, 우리 가정 안에서 하느님의 축복을 나누고, 미사 중에 신앙 공동체가 서로에게 주님의 평화를 빌어주며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그것을 전파해 나갈 수 있다면, 온 세상이 하느님의 축복으로 가득찰 수 있을 것입니다.

 

“속되고 헛된 말은 피하시오.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더 하느님께로부터멀어집니다.”(2디모 2, 16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