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상북도 칠곡의 공기 좋고 탁 트인 곳, 故 이기수 몬시뇰께서 살아생전 계시던 곳으로, 작은 수도원이라 불리는 이 곳에 이문희 대주교의 인가를 받아 성체를 모셔놓았다. 은퇴하신 후, 이 곳에 터를 잡고 바쁜 삶을 살고 계시는 윤광제(다위, 76세) 신부님을 찾아 뵈었다.
내게 다가 온 하느님
“94년쯤인가 나와 연락이 어렵다고 한 사람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네. 성직자 주소록에 아무리 봐도 내 거주지가 확실치 않다고 했지... 그래서 주교님께 은퇴를 청했네. 물론 나이도 있었고...”
윤광제 신부님은 95년 동명성당 주임신부를 끝으로 공식적인 은퇴를 하셨다. 은퇴 후에도 예수성심시녀회 포항모원 지도신부와 포항성모병원 원목신부로 계셨고, 97년 9월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특별 고해 신부로 활동하고 계신다.
경남지역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부친이 대구 신학교(현 대구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남산교정) 한글, 한문 선생님으로 오게 되면서 대구에서 성장하였다.
부모님 모두 믿음이 깊은 신자였다. ‘아버지는 오후 3시만 되면 어린 나의 손을 잡고 성체강복에 늦을세라 발걸음을 재촉했었지. 알아들을 수도 없는 이상한 언어(라틴어)로 부르는 노래에 나 역시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끼곤 했어. 그리고 매주 토요일 성모당에서 들려오는 성가와 묵주기도 소리에 하느님에 대한 존재와 사랑이 가슴안에 새록새록 피어났어.’ 그리고 그 당시 만나는 신학생마다 “너는 신학교 와라.”라는 말을 했는데, 그 말들이 거부감 없이 저절로 스며들어왔다고 한다. 윤광제 신부님의 사제의 길은 그렇게 정해졌단다.
어린시절 친구들과 함께 한 놀이도 언제나 미사를 집전하는 것이었다. “주교님이 쓰시는 주교관을 신문지로 만들어 쓰고 놀곤 했지.”라며 활짝 웃어 보이는 노사제의 미소는 봄빛처럼 화사하기만 했다.
신부님의 마음에 뿌리 내린 신앙심은 그렇게 깊어갔고, 드디어 신학교에 입학했다.
“신학교에 입학할 때 어찌나 기쁘던지... 그 기쁨을 이루말할 수가 없어서 매일 하느님께 기도했네. ‘성인신부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고, 하지만 그것이 어떤 특정한 성인을 두고 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내 삶을 굽어보시고 천당 가는 신부가 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말이었어.”
6·25 전쟁이 일어나고 신부님은 군대에 가면서 그 기도를 잊고 사셨단다. 다만 하루를 보낼 때마다 ‘신부가 될 수 있을까? 전쟁이 어떻게 될까?’라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지만, 그럴 때마다 신부님은 묵주를 꼭 쥐어잡고 하느님께 더욱 더 매달렸다.
1953년 4월 11일에 사제서품을 받은 신부님은 그 해 5월 육군 군종신부로 가셔서 군사목을 하셨다.
윤광제 신부님은 성령쇄신을 통해 하느님의 은혜를 참으로 많이 받으셨다고 한다. 겸손, 인내, 성인신부가 되는 것을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깨달았다고.
요즘도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미사를 드리는 날이 대부분이다. 경주로, 구미로, 김천으로 당신을 필요로 하는 곳은 어디든 달려가려 애쓰는 신부님은 이 삶 자체가 행복하고 감사하단다. “아직은 하느님께서 쉴 때가 아니라 하셔서 난 참 좋네. 하느님이 불러주시는 그 날까지 날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 가야지.” 비록 은퇴는 하셨지만 하느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삶, 바로 사제의 삶이다.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시작된 하느님에 대한 어린아이의 신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우리 선조들이 순교하시며 물려주신 이 값진 신앙을 지키기 위해 지금도 많은 사제들은 애쓰고 계신다. 우리 또한 우리 안에 살아계신 하느님의 사랑을 되새기며 ‘바르게 살고 있나?’를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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