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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교의 신비를 살아가는 사람들 - 사회사목국 병원사목부
이웃과 함께 주님께 의탁하는 하루


글 임 사비나 수녀|대구의료원 원목, 예수성심시녀회

 

의료원으로 출근하는 아침, 가로수 나무에 아롱아롱 맺혀 고개를 내밀고 있는 새순이 봄을 선물하려 저마다 앞다투는 요즘이다. 나의 첫 이웃들과의(?) 상쾌한 아침 인사가 끝나고 원목실로 향하는 본관 입구를 지날 때면 많은 사람이 각자의 업무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면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며 사람은 공동체 안에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정의에 새삼 공감하게 된다.

원목수녀로서 만나게 되는 많은 이웃들. 육신과 마음의 병으로 고통 중에 있는 환자들을 성심껏 치료하는 전문의, 의사의 치료에 직접적 협력자인 간호사와 요양보호사들, 환자의 병을 치료하는데 있어 환자와 보호자 가족의 궁핍한 재정 상태를 보조 및 지원하는 사회사업팀, 환자들의 육체적·정신적 고통과 외로움에 벗이 되어 주고자 자원하신 봉사자들, 그리고 병원 직원이자 그리스도 신앙인으로서 삶과 신앙의 현장에서 매 순간을 성실하게 사는 신우회 회원들. 또 병원 안에서 마주칠 때면 미소로 서로를 응원하며 힘을 실어주는 소중한 이웃들이다.

삶의 마지막 여정을 정리하며 임종을 준비하기 위해 입원 하신 호스피스 병동의 말기 암 환자 분들이 있다. 죽음을 앞둔 이와 그 가족들은 이미 몸과 마음이 지쳐 무거운 하루를 보내고 있으면서도 죽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임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며 가족과의 마지막 작별을 담담히 준비하는 몸짓은 숭고함 그 자체이다. 더불어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기 위한 나의 기도와 보살핌을 가장 필요로 하는 이웃이기도 하다.

담도암으로 입원하신 형제님에게 “형제님, 성모님께 이 고통을 잘 참아 받을 수 있게 해 달라고 묵주기도할까요?”라는 인사와 함께 기도하는 저의 목소리에 침묵으로 함께 기도하시고, 끝난 후 또 오겠다는 인사를 드릴 때 견디기 힘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감사…합니다.”라며 인사를 잊지 않는 형제님을 볼 때마다 그 누구의 인사보다도 진심이 느껴진다.

한편 신자인 환자 분의 병실을 방문하여 쾌유를 비는 기도를 하고 나오려 하는데, 옆에 계신 환자 분과 보호자가 우리도 기도 좀 해 주시면 하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계셨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혹시, 제가 환자 분을 위해 잠깐 기도해 드려도 실례가 되지 않을까요?”라고 여쭈었다. 그분께서 “기도해 주세요.”라며 두 손을 합장하셨다. 성호를 긋고 마음을 모아 기도를 하고 있는데 환자 분께서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하며 간절히 함께 기도하고 계신 게 아닌가? 기도를 청해 놓고 염불로 기도하는 남편 때문에 미안해 하는 보호자에게 괜찮다고 말한 뒤 기도를 마치고 병실을 나왔다.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마음 속으로 이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

전지전능하시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하신 하느님께서 당신 이름으로 자비를 청하지 않고 부처님의 협력(?)을 잠깐 빌었다고 남편을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하실 속 좁은 분이 아니심을 확신하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나의 억지일까?

날마다 만나는 많은 이웃들, 특별히 육신의 질병과 더불어 심신의 여유가 없어서 주님의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우리의 이웃과 함께 오늘도 주님께 의탁하며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

 

이천 년 전 착한 사마리아인의 행동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영적 귀감이 되는 것은 이웃을 종교의 틀에 옭아매어 놓거나 자신의 이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지 않고 그들의 딱한 처지에 있는 그대로 공감하며 행동으로 실천한 텅 빈 충만함 때문이 아닐까?

진정한 이웃이 된다는 건 경청과 공감이라고 한다. 우리는 마음을 열고 이웃에게 나누는 작은 사랑의 실천이 무엇보다 절실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웃과 함께 걸어가는 우리의 삶이 힘듦으로 여겨지지 않고 오히려 역동적으로 솟아나는 샘물을 끌어올릴 수 있는 마중물이 된다. 왜냐하면 이웃은 지속적으로 나를 성장하게 하는 영적 동반자요,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