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 년 전 교구청에서 소임 할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사제관 현관 쪽 지붕에 뭐가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궁금해서 올라가 창문을 열고 내려다보니 작은 새싹이 지붕의 작은 틈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있더군요. “우와! 어떻게 이런 곳에 살 수 있지?” 신기하고 놀라워서 사진을 찍고 한동안 계속 지켜봤는데 그 작은 생명은 척박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씩씩하게 자랐습니다. 그 모습을 관찰하다 보니 새삼스레 ‘하느님 창조 세계의 생명력이란 이런 것이구나’ 실감할 수 있었답니다.
창세기 1장에는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여기서 ‘좋았다.’라고 번역된 말이 히브리어로는 ‘토브’인데요. 천지창조 이야기에서 일곱 번이나 반복되는 이 단어를 저는 참 좋아합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느님의 마음을 가득 채운 느낌, 창조의 아름다움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그분의 모습이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창조의 과정에서 그렇게 원초적인 감정을 표현하시며 새로운 존재의 출현을 긍정하시는 분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인지 ‘토브’라는 단어가 저에게는 마치 ‘하느님의 감탄사’처럼 들립니다.
생태영성은 “보시니 좋았다.”라는 창세기 말씀으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오늘날의 기후 위기 속에서 쉽지는 않지만 ‘보시니 토브하였다.(좋았다.)’는 말씀을 잊지 않고 하느님 창조 세계의 경이로운 모습에 ‘감탄’과 ‘놀라움’으로 반응해 보자는 것이지요. 사실 미세먼지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하늘은 참 푸르고, 빛 공해 때문에 잊고 살지만 우리 머리 위에는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고 있습니다. 그런 세상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 ‘참 좋다’라고 긍정할 수 있는 마음이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찬미받으소서」 회칙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가장 뛰어난 장관에서부터 가장 작은 생명체에 이르기까지 자연은 경탄과 경외의 끊임없는 원천입니다.”(85항) 깊이 바라보면 누구에게나 ‘토브’한 면이 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세상 모든 것이 경탄의 대상이고 ‘감탄의 부싯돌’입니다. 봄이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철새들, 보도블록 사이에 돋아난 초록빛 이끼, 파란 하늘을 가득 머금고 흐르는 시냇물, 성모당에 앉아 기도하는 이들의 뒷모습… 그렇게 일상에서 만나는 작은 일에도 ‘오! 대단해’하며 놀라워할 줄 아는 모습에서 생태영성도 시작하는 것 아닐까요?
때로는 바쁜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돌아보며 자신에게 물어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보며 감탄하는지, 얼마나 자주 우리네 이웃과 다른 피조물을 긍정의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타자의 좋은 점을 좋다고 인정하고 ‘엄지척’을 해 줄 수 있는 내적 여유가 있는지 되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새로 출시된 자동차와 최신 스마트폰 앞에서만 ‘와우’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존재를 향해 ‘우와!’ 할 수 있을 때 일상의 당연함을 넘어 아이처럼 놀랄 줄 아는 눈빛과 ‘너를 향한 감탄사’가 살아 있을 때 우리는 친교의 생태영성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이 세상에서 부족한 것은 기적이 아니라 감탄이다.”라는 말이 있지요. 아무리 기적이 일어나도 우리가 경탄과 경이에 열려 있지 못하다면, 그 기적은 공허한 일로 끝납니다. ‘토브’라는 하느님의 감탄사가 우리 가운데 살아있게 합시다. 감탄사가 많은 세상은 생동감이 넘칩니다. 감탄은 곧 생명력이고 감탄할 줄 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세월은 우리의 주름살을 늘게 하지만 감탄사를 간직한 마음을 시들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은 문제 투성이고 사람들은 이기적이라고 하지만 감탄사가 살아 있는 곳에는 ‘서로를 향해, 서로 함께, 서로를 위해’ 사는 길도 열릴 것입니다. 그런 바람으로 연습해 봅니다. ‘야! 멋있다.’ ‘와! 아름답다.’ ‘아! 신비롭다.’ 요즘 아이들 말로 ‘오! 대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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