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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에서 온 편지
병자영성체(病人送聖體 : 빙런송셩티)


글 강우중 베르나르도 신부|타이중교구 선교사목

제가 전임 본당신부님을 처음 만났을 때 그분은 이미 아흔을 바라보고 있는 나이에 걷기조차 불편한 상태셨습니다. 은퇴를 하셔도 무리가 아닌 연세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본당사목을 하셨던 것은 이곳의 사제성소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합니다. 사실상 여기 교구는 한 사제가 두세 군데의 본당을 맡는 경우도 있으니 사제 성소가 부족하겠다는 짐작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니 연로한 나이와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사목활동을 멈출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의 열정은 그 어느 젊은 신부 못지 않았고 기력이 있는 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자 하시던 분이셨습니다.

신부님은 미사뿐만 아니라 일주일에 이틀을 병자영성체를 위해 출타하셨으며 교우들이 성경과 친숙할 수 있도록 성경통독반을 열어 함께 성경을 읽으셨고, 미국 출신인 만큼 이웃에게 영어를 가르치셨습니다. 이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병자영성체를 열심히 다니시는 신부님의 모습이었습니다. 고령화 시대로 접어든 만큼 우리 본당에는 스무 명 가량의 나이 드신 교우가 있습니다. 그분들의 나이는 적게는 80대 후반에서 많게는 100세를 앞두고 있습니다. 이분들은 대부분 외국인 노동자를 생활도우미로 고용해 살고 있으며 자녀들은 타이베이와 같은 대도시에서 살고 있어 명절이나 특별한 날이 되어야 찾아옵니다. 그러니 그분들의 평소 생활은 적적합니다. 그래서인지 어떤 분들은 병자영성체를 손꼽아 기다리며 신부님이 방문하실 때마다 반갑게 맞이해 주시고 병자영성체 중에도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 할 정도입니다. 또 어떤 분은 고해성사를 위해 이날을 기다리기도 합니다.

당시 저는 말을 배우고 있었기 때문에 수업이 없는 날에는 신부님이 행하시는 병자영성체를 참관하기 위해 동행했습니다. 신부님은 늘 교우 두 분과 함께 병자영성체를 하러 길을 나섰는데, 한 분은 교우들의 집을 찾는데 도움을 주시고, 다른 한 분은 신부님께 어깨를 빌려 드려 보행에 도움을 주셨습니다. 병자영성체를 받아도 무리가 아닌 신부님이 이렇게 한 집 한 집 꿋꿋이 걸어가시어 성사를 거행하는 모습을 보면 사목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일을 그만두지 않으시는 모습에 병자영성체를 받는 교우들은 큰 감동을 받는 듯 했습니다. 아마도 신부님의 나이와 그분들의 나이가 비슷하고 함께 세월을 살아온 그 시간들이 주는 감정이 남달랐을 것입니다. 게다가 신부님이 교우의 어깨에 의지해 걷는 모습을 보면 오랜 세월 동안 이들이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왔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신부님이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되셨을 때 병자영성체가 그대로 저에게 주어졌습니다. 저 또한 미사를 제외한 다른 어떤 일보다 이 일에 정성을 쏟았는데 저에게 많은 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뭐라 말할 수 없지만 그저 느껴지는 무언가가 타지의 삶에 큰 버팀목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바로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당분간 교우 분들을 방문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도 이분들에 대한 관심을 놓을 수 없어 임시방편으로 병자영성체에 동행하시던 교우들에게 전화로 자주 연락이라도 해 드릴 것을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몇 년간 이어진 팬데믹으로 병자영성체에 대한 교우들의 마음이 조금 변한 듯 보였습니다. 연락이 잘 되지 않는 분이 생겼고, 다치거나 병세가 악화되면서 방문을 거부하는 분들도 생겨났습니다. 그 이유를 알아보니 감염이 두려워 방문을 거절하고, 또 신부님이 오면 대접을 해야 하는데 몸이 불편해 죄송한 마음에 방문을 거부했다고 합니다. 또 다른 분은 신부님을 보면 자신이 세상을 떠날 때가 된 것 같아 두려워 방문을 거부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문제였던 것은 병자영성체를 도와주시는 분들이 이런 경우에 그분들의 마음을 어떻게 돌려야 할지 몰라 방관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병자영성체에 대한 교우들의 생각을 어떻게 바로 잡아드려야 할지 고민하다가 복음 내용 한 부분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열심히 일한 종을 시중드는 주인의 비유였습니다. 생각해 보면 병자영성체를 받는 많은 분들은 대부분 연로하신 분들로 오랜 세월을 고생하며 살아왔습니다. 이런 분들께 병자영성체는 그들의 노고를 알아주고 위로해 주는 성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점을 교우들과 나누었을 때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뜻을 병자영성체를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또한 저와 봉사자들이 방문 때마다 코로나 자가진단 검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자 병자영성체 활동은 정상화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