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재건의 구상
폭동으로 제주읍 본당은 파괴되고 약탈당하여 라크루(구) 신부는 얼마 동안 거처할 곳이 없었지만, 제주 목사(牧使)와 협력하여 사태수습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민란은 일단 진압되었으나 오랜 세월 동안 그 후유증이 남아 포교 진전에 장애가 되었다. 이에 라크루(구) 신부는 민심수습에 온 힘을 기울였지만, 풍물이 아주 다른데다가 언어까지 특이한 사투리가 많아 마치 다른 나라인 듯한 인상을 받았다. 더욱이 제주도는 조상 대대로 이어 온 제주 사람들의 배외정신과 미신의 인습으로 포교의 어려움이 무척 컸다. 그래서 민중 계몽의 시급함을 느껴 ‘바람 많고(風多), 돌 많고(石多), 여자 많은(女多) 삼다(三多)의 고장’에 여성 개화(開化)를 위한 교육기관 설립을 구상하게 되었다.
라크루(구) 신부는 1909년 제주도 여성의 개화를 목적으로 신성(晨星)여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이 ‘신성여학교’는 바로 제주도에서 처음 생긴 여자 초등 교육기관으로 4년제 학교였다.
신성여학교 설립
당시엔 봉건적 사조가 짙어 남자들도 신학문 공부를 기피하는 시절이었지만, 라크루(구) 신부의 끈질긴 노력으로 제주도내 유지 인사 집안의 자녀 30명이 신성여학교에 취학하였다. 교사, 교구 등의 시설은 물론 학용품까지 신부의 사재를 털어 충당하였다.
라크루(구) 신부는 교육을 담당할 선생을 서울에 있는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에 의뢰하였는데, 수녀원 측에서는 1909년 11월 5일 김 아나다시아 수녀와 이 공사가 수녀를 제주도에 파견했다.
두 수녀는 남쪽의 먼 섬나라 제주도를 향하여 서울을 출발하였는데, 20일이 걸려 11월 25일에야 제주도에 도착하였다. 이렇게 예상 밖으로 여러 날이 소요되자, 수녀원 본원과 제주도에서의 안타까움과 걱정은 말할 수가 없었다. 늦어진 이유는 이 공사가 수녀가 독감에 걸려 아픈 중에 출발하여 목포까지는 갔으나, 도중에 병이 아주 심해져서 어떤 교우집에 누워 일주일 동안 몹시 앓았기 때문이었다.
일행은 11월 15일 억지로라도 배를 타고 제주도로 향했는데, 가던 중 풍랑을 만나 제주도로 바로 가지 못하고 바람에 밀려 외딴 섬에서 또다시 일주일을 기다려야 했다. 이런 저런 일로 수녀들이 고생하는 바람에 서울에 소식을 전할 수가 없었다. 목포에서 제주도로 가는 배를 타고 라크루(구) 신부에게 ‘제주도로 가는 수녀 배 탔습니다.’고 전보를 보냈었는데, 수녀들이 탄 배가 풍랑을 만난 탓에 전보를 보낸 후 10일만에 제주도에 닿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수녀들은 1909년 11월 25일 제주도에 도착하여 본당이 있는 마을까지 가게 되었다. 당시 제주도의 교통수단은 대부분이 말(馬)이었으므로 수녀들 역시 말을 타고 들어가게 되었고, 말을 모는 마부는 남자가 아닌 여자들로 선정했다.
1909년 당시 제주도와 목포를 오가는 여객선은 주 1회였으나 정기적이 아니고 부정기적이었으며, 바다를 건너는 데는 24시간이 소요되었다. 또한 선착장(船着場) 시설이 없어 기선이 바다 가운데 정박하면 종선(從船)이 마중 나가서 선객과 짐을 옮겨 싣고 해변으로 나와 상륙했는데, 종선에서 해변으로 상륙하는 데는 인부를 빌려 업혀야 했다. 육지에 내려 먼 곳에 가려면 말을 세 내어 탔고 단지 몇 대의 자전거만이 있었을 뿐이다.
수녀들의 고생
처음 보는 기이한 옷차림을 한 수녀들의 제주도 도착은 제주도 사람들의 이야기거리가 되었는데, 그 중에는 악의에 찬 허무맹랑한 헛소문도 많았다. 수녀 복장에 쏠리는 눈초리와 꼬리를 물고 퍼지는 악담이나 풍문에도 아랑곳 않고 수녀들은 오직 열성과 사랑으로 교육과 포교사업에 정진하였다. 제주도에는 열매 맺는 나무와 꽃 피는 야채가 많아 이런 식물들을 손수 재배하여 자급자족하는 한편, 널리 일반에 보급하기도 했다. 이리하여 신성여학교는 제주도민의 신뢰받는 교육기관으로 자리잡아 갔다.
주교 일행의 한라산 답사
주교로서는 처음 제주도를 답사하게 된 드망즈(안세화) 주교는 1911년 10월 20일 제주도에 도착하여 라크루(구) 신부가 사목을 맡고 있는 제주읍 본당(대로동 삼도리)에서 4일간 체류하였다. 그리고 24일(화) 아침 6시 제주읍 본당을 출발하여 다음 순방지로 가게 되었는데, 일행은 라크루(구) 신부와 타케(嚴, 서홍리 본당) 신부를 포함하여 수행신자들과 마부, 짐꾼 등 여러 사람이었다. 현재는 제주시와 남제주 서귀읍을 직결하는 한라산 횡단도로(41Km)가 개통되어 있지만, 91년 전 그때의 도로와 교통사정은 불편하기가 이루 다 말 할 수 없는 시대였으므로, 주교 일행은 한라산 중허리를 넘어서 남제주인 정의군 홍로동(서홍리)에는 이날 늦게 도착하였다.
홍로(서홍리)본당은 제주읍 본당과 함께 설정된 남제주의 한논(大畓)본당을 이곳으로 옮긴 것으로, 신축년(1901년) 민란 후 제르만 무세(文濟萬, 문제만) 신부가 옮기게 했다. 폭도들에 의해 파괴되고 약탈당하여 폐허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세(문) 신부는 1902년 4월 20일 교구 사제이동 때 경남 마산포(馬山浦)본당으로 전임되고, 마산본당의 예밀 타케(嚴宅基, 엄택기) 신부가 홍로(서홍리)본당을 사목하게 된 것이다.
유명한 식물학자
타케(엄) 신부는 홍로에 부임하여 1915년 목포본당으로 전임되기까지 13년간 홍로본당을 사목하면서 제주도산 식물을 연구하였다. 특히 벚나무 원종(原種)을 발견하였고 밀감나무를 많이 재배하여 제주도의 산업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홍로에 체류하는 동안 드망즈(안) 주교는 정말 휴가 기간과도 같은 날들이었다.
10월 30일(월) 제주의 2개 본당 순방을 끝마친 주교 일행은 새벽 5시 30분 홍로를 출발하여 다시 한라산 산림을 지나서 해발 1,000m까지 올라갔다. 주교와 신부들은 마침 이날 생일을 맞은 타케(엄) 신부의 건강을 위해 건배하고 미사주를 한잔씩 마시며 축하했다. 산에서 내려와 산림을 빠져 나온 주교와 신부들은 말을 타고, 수행원들은 보행으로 지난 24일 왔던 길로 다시 제주본당을 향해 갔는데, 밤 늦게야 도착할 수 있었다. 31일은 휴식하고, 11월 1일은 모든 성인의 날 대축일이었으므로 제주읍 성당에서 주교미사가 거행되고 많은 교우들이 영성체를 하였다.
11월 7일(화) 부산으로 향하는 배를 기다리는 동안 주교는 제주읍내 거리를 산책하였다. 그리고 11월 8일(수) 두 신부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드망즈(안) 주교와 김 야고보 복사는 부산으로 가는 여객선에 올라 석양에 아름답게 비친 수평선 위 제주 섬의 먼 경치를 갑판 위에서 바라보며 제주도를 떠났다.
11월 9일(목) 저녁 6시 여객선은 부산에 도착했다. 배에서 내려 주교가 선교사로 조선에 와서 처음 1년 동안 사제생활을 한 초량본당에 들렸는데, 이때 초량본당 신부는 마리오 쥬리앵(權裕良, 권유량) 신부였다.
11월 10일(금) 새벽 6시 초량역에서 기차를 타고 10시 45분 대구역에서 내렸는데, 역에는 페네(배) 신부와 무세(문) 신부가 마중 나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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