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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시절 -안주교의 호남지방 사목순방(7)
초창기 제주교회의 시련


윤광선 (비오). 영남교회사연구소 명예소장

최초로 탐라섬을 답사한 주교

1911년 10월 19일(목) 목포순방을 마치고 제주도로 가기 위해 목포항에서 미우라 마루(三浦丸)라는 제주행 배를 타게 되었는데, 오후 5시에 승선했으나 3시간을 기다려 저녁 8시에 출항하였다.

 

20일 새벽 3시에서 아침 7시까지 추자도(楸子島)에 정박한 후 정오에 제주도에 도착하였다. 라크루(마르셀 具) 신부와 타케(에밀리오 嚴) 신부가 삼판(三板 : 항구 안에서 사람이나 물건을 나르는 작은 배)을 갖고 주교를 모시러 왔다. 많은 교우들이 마중 나와 열렬히 환영하였으며, 드망즈(안) 주교와 주교복사는 제주도의 두 본당 신부와 신자들의 안내를 받으며 환영문이 세워져 있는 삼도리(三徒里 大路洞)의 제주읍 성당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었다.

 

한반도에서 남으로 해로 66마일인 추자도에서 또 31마일의 바다 가운데 외딴 큰 섬 제주도는 한국의 최남단인데, 드망즈 주교는 이 ‘탐라(耽羅) 섬’을 답사한 첫 감목이 되었다.

 

제주도의 복음 전래

천주교 신자가 제주도에 처음 들어 간 것은 신유박해(1801년) 때 순교한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의 부인 정명연(丁命連, 마리아 : 일명 蘭珠)이었다. 그녀는 남편의 죄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는데, 정 마리아가 이곳에서 전교활동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음으로는 1857년 경 제주도 출신의 사공 김기량(金耆良, 펠릭스 베드로)이 중국 광동에 포류하다가 홍콩에서 조선인 신학생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고 고향에 돌아온 뒤 1860년까지 약 20명을 개종시켰으며, 1866년 사망할 때까지 제주에서 전교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병인박해 이후 제주의 신자들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30년이 지난 1898년 이섬 중문면(中文面) 색달리(穡達里)에 사는 양씨(베드로)가 육지에 머무를 때에 영세하여 제주에 돌아와서 신씨 형제(아우구스티노와 바울로), 보성리(保城里) 김생원과 강씨(토비아)에게 전교하였다. 그 결과 4가문이 열심히 수계하며 신부 오시기를 고대하던 중, 1899년 5월 페네(C.Peynet, 裵加祿) 신부와 한국인 김원영(金元永,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정식으로 제주도에 파견됨으로써 본격적인 전교활동이 시작되었다.

 

당시 제주도의 행정구역은 1목(牧) 3군(郡)으로 목사(牧使) 아래 군수(郡守)가 있고, 한라산 북쪽에 있는 제주군과 남쪽에 대정(大靜), 정의(旌義) 등 3개 군으로 편성되었으며, 인구는 4만명 내외였다. 페네(배), 김원영 두 신부가 제주의 첫 전교 신부로 부임하여, 얼마 동안 함께 있다가 페네(배) 신부는 제주읍내에, 김원영 신부는 1900년 6월부터 한논(西歸浦面 好近里)에서 전교하게 되었는데, 페네(배) 신부는 제주도의 기후풍토가 체질에 맞지 않아 부임 1년만에 전라북도 수류(水流)로 전임되고, 수류의 라크루(구) 신부가 1900년 봄에 제주읍에 부임하였다.

 

미신에 사로잡힌 섬사람들

그러나 당시 제주의 종교적인 상황은 제주민담에 “당(堂) 오백 절 오백”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 지방은 원래 민간신앙이 강성하여 사신(蛇神) 또는 무당을 숭배하고, 각 처에 신목(神木), 신당(神堂)을 세우는 등 토속적인 신앙생활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외래 종교를 전파하는 선교사들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감정을 지니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런 상황은 제주에 파견된 신부들도 잘 알고 있었는데, 페네(배) 신부는 파견된 그 해에 뮈텔(閔) 주교에게 다음과 같은 서한을 적어 보냈다.

 

① 배에서 만난 제주도 주민 한 사람은 우리가 자기 지방에 전교하러 간다는 사실을 알고는 우리가 만일 교회를 세운다면 사람들이 그것을 허물어뜨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② 사람들이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주려고 하지 않으며, 아무 것도 팔려고 하지 않습니다.(1899년 7월 21일자)

③ 그들은 지나치게 미신을 믿으며, 지독한 미신을 지니고 있습니다.(1899년 10월 8일자)

④ 지금까지 우리는 대단한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거의 우리끼리만 있었기 때문입니다.(1899년 10월 28일자)

⑤ 제주읍에서 우리는 반감을 일으켰고 적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대다수의 경우가 그런 입장이었습니다. 봄에 개와 소 그리고 말이 광기를 보이면 그 이유가 그곳에 온 개신교 목사들 때문이라고 말을 합니다. 여름에 비가 오지 않고, 가을에 바람이 거세게 불어 수확을 망치는 것은 저 때문이랍니다. 이 모든 이유들로 동족들의 사람 보는 방식을 괴로워하는 선량한 사람들은 주민들의 눈치를 보느라 우리에게 올 수 없습니다.(1899년 10월 30일자)

 

이상의 기록에서 볼 때 당시 제주민들은 천주교를 포함한 외래종교에 대해 상당히 배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교회를 허물겠다든지, 물건을 팔지 않겠다든지, 선교사들과 접촉을 꺼린다든지, 심지어 자연적인 현상까지도 선교사들의 탓으로 돌리고 있는 것은 그들의 의식 정도를 드러내 주는 것이었다.

 

외래종교를 원수처럼

이에 대해 신부들은 제주민들의 신앙체계, 즉 이들이 지나치게 미신을 믿고 있고, 지독한 미신에 빠져 있는 첫째 원인을 찾고, 따라서 선교적인 입장에서 먼저 미신타파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미신타파 활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초기에는 성과를 거둘 수 없었고 오히려 마찰만 불러 일으켰다.

 

그런 가운데 지방관(官)과 일부 유배인(流配人)들은 선교사들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며, 천주교의 정착에 일정한 역할을 해 주었다. 즉 제주 군수의 경우 자기 아이들의 프랑스어 교습을 부탁할 정도였고, 유배자인 김경하와 장윤선은 선교사들의 거처를 마련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페네(배) 신부 후임으로 부임한 라크루(구) 신부는 “유배자들 없이 지낸다는 것이무척 어려운 일”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선교사들은 지방관과 유배자들의 도움으로 정착의 기틀을 마련하는 한편, 프랑스어 교습을 통해 간접적인 전교 효과를 기대하거나 김원영 신부처럼 제주민들의 개종을 위해 <수신영약>을 저술하는 등 전교에 적극적으로 힘을 쏟았다.

 

그 결과 1900년 전반기에 19명이었던 교세는 1년만인 1901년에는 영세자 242명, 예비신자 600-700명으로 늘어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신축 제주도 교난

교회에서는 ‘신축교난(辛丑敎難)’, 일반적으로는 ‘제주민란(濟州泯亂)’, 역사학자들은 ‘제주교안(濟州敎案)’으로 불리는 1901년(光武 5년 辛丑) 제주도에서 발생한 반란 사건은 제주도민과 지방관리, 서울에서 온 봉세관과 유배인, 일본인 어업자, 그곳 선교를 위해 파견된 프랑스 선교사와 천주교 신자 사이에서 발생한 경제적·사회적으로 대단히 복합적인 상황과 원인으로 서로 충돌을 피할 수 없었던 여건에서 발생한 대규모의 민란이었다. 당시의 목민관(牧民官)들은 모두 탐관오리들로, 백성들의 원한은 가렴주구(苛斂誅求)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1900년부터 중앙에서 봉세관이 내려와 토지, 가옥, 수목, 어망 등등 온갖 잡세를 거두어 감으로써 백성의 원성은 더욱 높아만 갔다. 이때 새로 입교한 신자들 중에는 진리나 신앙보다 천주교 신자가 됨으로써 얻는 혜택 때문에 교회를 찾는 무리들도 섞여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 무렵 프랑스 선교사들에게는 「나와 같이 대우하라」(如我待)는 칙령(勅令)이 내려져 있어 외국인 성직자는 나라의 이 호조(護照)를 갖고 있었으므로 신부들의 권력을 이용하여 현세의 이권을 노리고 신자가 된 자들도 많았다. 이런 무리 중에는 악질 관리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섬사람들에게 행패를 부리기까지 하는가 하면 또 천주교 신자가 국유지나 공유지를 불하 받아서 거기 있는 신목(神木)과 신당(神堂) 등 토속신앙의 대상을 철거하는 과정에서 섬사람들과 충돌이 잦았다. 한편 천주교가 번창하는 것을 시기하고 있던 무당, 퇴기(退妓), 관기(官妓)들 그리고 제주 근해에서 우리의 어장과 어업을 침식하고 있던 일본 어업자들의 계교가 작용해서 천주교에 대한 도민의 감정은 악화일로였다. 그때 대정 군수 채구석이 토착세력들을 규합하여 만든 ‘상무사(商務社)’ 사원과 교인(신자)들과의 소규모 감정대립이 확대되어 일어나게 된 이 사건은 특히 일본 식민주의 한국진출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일본인들은 상무사를 원조하고 무기를 공급하며 배후 조종을 했던 것이다.

 

1901년 2월부터 “성당에서 사람을 죽였다.”는 헛소문을 퍼뜨려 도민을 선동하고 몇 차례 집회 끝에 드디어 신부들이 서울에 피정 간 사이 5월 11일, 채구석과 배교자 강우백 등이 선봉이 되어 일본인으로부터 받은 총, 칼 등으로 무장한 폭도들은 동진, 서진으로 편대하여 제주읍성을 점령하려고 황사평(黃沙坪)에 집결하여 행동을 개시하였다. 이때 신자들은 위험을 느껴 성안에 있었으며, 성을 수비하기 위해 목사(牧使)에게 무기고를 열 것을 요청, 성의 수비를 맡아 제주성을 포위한 폭도들과 치열한 공방전(5월 16-28일)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성안에서 폭도들에게 동조한 부녀(妓女와 무당)들이 성문을 열어 줌으로써 5월 29일 유례없는 잔인한 동족·동향인 살해의 만행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로써 관덕정(觀德亭) 앞에서 150여 명의 신자와 양민이 무참한 죽음을 당하고 다른 곳에서 500-600명이 피살되었다.

 

 

신자와 양민 700명이 희생되다

선교사들이 연례 피정을 하기 위하여 서울 주교관에 모이고 4월 27일에는 교구 인사이동이 발표되었는데, 이때 제주 한논본당의 김원영 신부가 전임되고 김 신부의 후임으로 1900년 10월 9일에 입국한 제르만 무세(G.Mousset, 文濟萬) 신부가 임명되었다.

 

라크루(구) 신부와 무세(문) 신부는 피정을 마치고 제주도로 갔는데, 목포와 부산의 신부들로부터 제주의 반란 폭동을 알리는 전보가 서울 주교관에 전달되었다. 즉시 프랑스 공사관을 통하여 위험에 처한 제주도에 있는 두 신부의 구출을 위한 긴급조치가 취해지기 시작하였다.

 

결국 프랑스군함 두 척이 급파되었고 한국 정부에서도 관군(강화진위대)을 파견하였다. 또 일본군함 한 척까지 출동해서 폭동은 20여 일만에 일단 종식되었지만, 사건의 뒷처리 때문에 프랑스, 미국, 일본 등이 개입하는 국제문제로까지 확대되었던 큰 비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