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열기
요즘 우리 나라는 월드컵의 열기로 가득합니다. 100일이 채 남지 않은 대회 준비를 위해 온 국민의 관심이 월드컵으로 몰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듯합니다. 선수들은 16강 진출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고, 정부, 월드컵조직위원회, 개최도시를 비롯한 월드컵과 직접·간접으로 관련 있는 이들이 각종 월드컵 특수를 기대하며, 하루하루 철저한 준비를 위해 여념이 없습니다. 2002 월드컵은 최근의 정치·경제적 어려움을 반전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여느 대회 이상으로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어느 문화 평론가의 월드컵에 대한 단상(斷想)은 제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는 얼마 전부터 축구경기에서 새로운 매력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월드컵과 같은 세계 수준의 축구 경기를 재미있게 관전하는 것은 오래된 일이지만, 그가 요즘 즐기는 축구는 관객으로서 보는 축구가 아니라 선수로서 직접 뛰는 축구라고 했습니다. 소위 ‘동네 축구’라 불릴 만큼 경기수준은 형편없다 하더라도, 구경꾼 입장에서 경험하는 세계와 그라운드에서 직접 뛰면서 느끼는 세계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 그의 설명입니다. 세대와 전공을 달리하는 교수 사이의 관계나, 교수와 학생 사이의 관계라는 사회적으로 부여된 신분으로 서로 엮일 때, 또 같은 운동복을 입고 지위 고하를 벗어나 몸과 몸을 부딪히면서 엮일 때 그 차이는 엄청나게 크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몸과 몸을 가진 존재로서 부딪히며 형성된 관계 속에서 각각의 주체는 더 자유로울 수 있고, 그들이 맺는 관계는 더 민주적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입니다.
이런 뜻에서 그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지금까지 스포츠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은 스포츠 엘리트를 양성해서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국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가에 모아졌습니다. 그 결과 우리 나라는 상당한 수준의 스포츠 강국이 되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낱 구경꾼밖에 될 수 없었습니다. 국민 소득이 얼마가 되고 수출이 얼마가 된들, 나에게 돌아올 삶의 질이 높아지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스포츠 대회에서 금메달을 몇 개 따더라도 정작 국민들의 건강을 증진시키지 못하는 스포츠 정책은 팥소 없는 찐빵과 다를 게 없다는 말입니다.
월드컵이 벌어지는 다른 한 편에서 스스로 뛰고 달리면서 몸으로 부딪히는 보통 사람의 삶의 축제로써 축구제전을 벌여 본다면, 그러면서 크고 화려한 것보다 작고 소박한 것이 더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을 새삼 느껴 볼 수 있다면 참으로 좋겠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고, 그가 주장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이었습니다.
“패러다임(Paradigm)”이라는 말은 미국의 토마스 쿤(Thomas kuhn)이라는 사람이 「과학 혁명의 구조」라는 자신의 책에서 처음 사용한 것으로, 원래는 과학용어였습니다. 오늘날 이 말은 일반적으로 “어떤 한 시대 사람들의 의식이나 견해를 지배하고 있는 이론적인 틀”이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이 틀, 사고방식의 틀, 그래서 어쩌면 굳어진 사고체계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고서는 더욱 미묘하고 복잡한 미래의 문제들을 해결해 나갈 수 없기에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사람들은 곧잘 말하는 것입니다. 마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로 인해 모든 것이 새롭게 해석되고, 변화·발전되기 시작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 아이들의 세대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또 다른 복잡 미묘한 일들로 가득할 것입니다. “자식에게 물고기를 잡아주지 말고 대신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라.”는 탈무드의 가르침과도 같이, 부모는 아이가 지식을 창의적으로 활용하는 자녀가 되기를 희망할 것입니다. 단순히 공부를 잘하기보다 창의적인 사람이 출세하는 시대라는 인식은 부모의 이러한 바람을 더욱 간절하게 합니다. 우리 아이가 창의적인 자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부모의 생활태도나 사고 방식이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지식을 창의적으로 활용할 줄 아는 부모를 통해 창의적인 가정의 분위기에서 자녀들은 저절로 이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하기
창의적인 사고를 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사고의 틀, 즉 패러다임(para-digm)을 바꾸어 새로운 개념이나 방법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그리스도교 신자인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할 때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로마 8,28참조)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틀에 얽매이지 않고 하느님 안에서 자유롭게 사고하며 행동하시는 예수님의 모범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마태 22,21)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올가미를 씌워 잡아가려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러한 대답을 들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경탄을 금치 못하고 예수님을 떠나갔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마태 22,22참조) 그들이 그렇게 두 말 없이 떠나가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몇 해 전에, 이스라엘은 로마인들에 의해 점령되었습니다. 그때 갈릴래아의 유다라는 사람은 ‘황제에게 주민세를 냄으로써 다른 민족의 지배를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선언하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반란은 유혈 속에서 진압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황제에게 주민세를 바쳐도 되느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문을 받은 예수님은 매우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로마제국에 세금을 내야 한다고 말하면, 로마의 지배를 인정하는 반민족적인 선택이 되므로 유대인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고, 세금을 거부했다가는 로마제국의 법에 대한 위반으로 처벌받을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 또는 로마인들의 사고체계 안에서는 ‘황제에게 주민세를 바쳐도 됩니까?’라는 질문에 ‘예’, 또는 ‘아니오’를 벗어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내심 ‘드디어 예수를 잡아갈 수 있겠구나!’하고 기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생각의 틀, 곧 당시의 패러다임에 얽매여 있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 이 말씀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시간’의 한계 안에 갇혀있는 사람들의 생각을 ‘영원’을 향해 끌어올리신 것입니다. 유한한 인간의 영역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무한한 하느님의 영역에까지 끌어올리신 말씀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인들은 로마법을 위반하는 데 따르는 ‘일시적인’ 벌은 두려워하면서도, 하느님의 법을 어기는 데 따르는 ‘영원한’ 벌은 두려워 할 줄 몰랐습니다. 또한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하느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 합니다. 하느님의 눈보다 사람들의 눈을 더 의식하고, 하느님의 심판보다 사람들의 평판에 더 관심을 갖습니다.
만일 자녀들의 눈에 부모의 삶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 사람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비친다면, 우리 아이들이 예수님처럼 하느님 안에서 자유롭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일 뿐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참된 신앙인으로 성장하기를 희망한다면, 부모에게 먼저 패러다임의 전환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깊이 알아들어야 하겠습니다.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하는 하느님 말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악한 자들의 많은 재산보다 의인의 가난이 더 낫다.”(시편 37,16)
“재산을 쌓아 놓고 다투며 사는 것보다 가난해도 야훼를 경외하며 사는 것이 낫다.”(잠언 15,16)
“서로 미워하며 살진 쇠고기를 먹는 것보다 서로 사랑하며 채소를 먹는 것이 낫다.”(잠언 15,17)
“함부로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은 용사보다 낫다. 제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성을 탈취하는 것보다 낫다.” (잠언 16,32)
“높은 사람 앞에서 ‘내려가라’는 말을 듣는 것보다 ‘이리 올라오십시오’하는 말을 듣는 편이 낫다.”(잠언 25,7)
“부정으로 재산을 모으는 것보다 가난해도 정직하게 사는 편이 낫다.” (잠언 28,6)
“어리석은 사람에게 찬양을 받는 것보다 지혜로운 사람에게 꾸지람을 듣는 것이 좋다.”(전도 7,5)
“무식하지만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유식하면서 율법을 어기는 것보다 훨씬 낫다.”(집회 19,24)
“오른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눈을 빼어 던져 버려라. 몸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마태 5,29)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넣었다.”(루가 21,3)
“나는 여러분도 이렇게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하신 주 예수의 말씀을 명심하도록 언제나 본을 보여 왔습니다.”(사도 20,35)
실천하기
패러다임의 전환은 문명의 발전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삶의 혁명적인 변화를 가능케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윌리엄 제임스의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성격이 바뀌고, 성격이 바뀌면 인격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는 말처럼 세상이나 사람을 보는 관점, 즉 생각에 따라 행동, 습관, 성격, 인격, 운명이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참으로 성숙한 신앙인으로 살아가기를 바란다면, 아니 그보다 참으로 행복한 삶을 엮어가기를 원한다면, 부모가 먼저 참된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가정의 부모가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또 하나의 패러다임의 전환일 것입니다.
우리의 패러다임은 과연 시간이 아닌 영원에로, 그리고 ‘하느님’께로 개방되어 있는지를 살펴봅시다. 예수님처럼 인간적인 패러다임을 넘어설 때, 시간이 아닌 영원에로 열린 생각을 가지고 살아갈 때, 나 중심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으로 살아갈 때, 우리에게 올가미를 씌우고, 우리의 삶을 혼란스럽게 하는 이들도 경탄하면서 우리를 떠나갈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서 생명을 얻는지, 세상이나 돈에서 생명을 얻는지 진지하게 묵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런 뜻에서 가족이 함께 나들이를 가는 것보다 함께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 중요하며, TV시청이나 숙제를 하는 것보다도 정한 시간에 가족이 함께 기도하는 일이 더 중요한 일임을 아이에게 가르치는 일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제부터 우리 가족이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정해 보십시오. 이런 작은 실천들이 우리 아이에게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습관을 갖게 할 것입니다.
“재물과 힘이 있으면 자신이 생긴다. 그러나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마음을 보다 더 든든하게 한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부족함이 없고 다른 아무 것에도 의지할 필요가 없다.”(집회 4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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