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되면 옷이 가벼워지기 마련이다. 하나 둘 훌훌 털어버리고 싶은 마음, 겨우내 감추어 두었던 마음을 열어보이기라도 하듯 그렇게 봄은 오고 가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따뜻한 봄날, 작업실 한 켠에서 뽀오얀 먼지가 내려앉은 두터운 가죽점퍼에 하얀 고무신을 신고, 열심히 작업 중인 이홍구 화백. 6월에 열릴 전시회 준비로 바쁘게 살고 있는 그와 요셉의 집 식구들을 만나 보았다.
요셉의 집
그가 현재 살고 있는 곳은 이미 폐공소가 된 구미의 임은동공소이다. 임은동공소는 작업실로, 공소 옆 공터에는 컨테이너 건물을 마련하여 2명의 장애우들이 살도록 했다. 그곳에서 장애우들에게 이콘을 가르치며 재활을 도와주며 살아가는 이홍구 씨.
마당으로 들어서자 삶의 솔솔한 재미가 전해진다. 플라스틱 통에 심은 단풍나무, 은행나무, 대추나무 등 수십 여 그루의 나무가 마당을 따라 진열되어 있다. 더욱이 땅을 돋우어 비닐을 씌워 만든 곳에 소복이 자라난 미나리들하며... 이콘에 빠져 산다길래 그림만 그릴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나 보다. ‘구미’라는 도시적인 이미지와는 다르게, 시골 같은 조용한 그 곳에서 그는 발비나 씨, 가타리나 씨와 함께 알콩달콩 소박하게 살아가고 있다.
요셉의 집에서의 삶은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외국에서 활동하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한국에 잠시 들렀다. 그러다 평소 친분이 두텁던 전재천 신부님을 만나뵈었고, 전 신부님의 제안으로 장애우들의 자활을 통해 이콘과 복음을 전하리라던 자신의 꿈을 이루게 되었단다. 그래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장애우들을 찾던 중, 지금의 발비나 씨와 가타리나 씨를 만났다.
“두 천사들이 제일 고생이 많아요. 그림은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색과 씨름하는게 보통 체력으로도 견뎌내기 힘들어요.” 체력 소모가 많은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두 천사는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하루종일 이젤 앞에 앉아 있다. 그들의 숨은 노력을 알기에 이제 제법 색깔을 내는 그들이 이홍구 씨는 대견스럽다고. “나의 후계자들입니다. 발비나와 가타리나가 어느 정도 실력이 되면 또 제자를 키우고, 그렇게 반복되면서 이콘을 그리는 장애우들이 많이 생겨났으면 좋겠습니다.”
이콘은 눈으로 보며 침묵 속에 드리는 기도
이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기도의 도구로, 눈으로 이콘을 응시하며 침묵속에 바치는 기도가 바로 이콘이다. 이콘은 형상화 된 신학, 즉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신비에 접근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 성인들, 그리고 성서의 특별한 내용들과 교회사 속의 중요한 사건들을 소재로 한 그림이나 부조, 모자이크 등을 가리켜 이콘, 즉 성화상이라 한다. 그리고 이콘의 형태와 색깔은 화가 자신의 주관적 상상력이 아니라 오래된 전통에 순명하여 대대로 전수되어 온다.
아직 우리 나라에는 이콘에 대한 관심이 세계 여느 나라에 비해 아주 낮다. 그도 서양화를 전공하다가, 이콘을 처음 보았을 때 무척이나 생소했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빠져들더니 그 정이 식을 줄 몰랐다. 지루한 작업이긴 하지만 그런 마음이 들기는 발비나 씨와 가타리나 씨도 마찬가지라고.
갑자기 그가 서양화에서 이콘으로 전공을 바꾼 이유가 궁금하다. “서양화를 계속했더라면 그냥 좋은 작품을 자유롭게 그리며, 이름을 알리고 돈도 좀 벌었겠죠? 그런데 하느님을 믿는 저로서는 그냥 ‘이건 내가 아니다’라고 느꼈어요. 그림 그리는 것 이상의 기쁨이 없다고나 할까. 즉 나를 위한 기쁨은 즐겁지가 않은거에요.” 그래서 그는 오랫동안 망설이다 이콘으로 전공을 바꾸게 되었고, 그것은 그의 온 삶을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아테네에서 15년 간 이콘 작업을 했고, 그리스에서 4년 동안 신학공부를 한 이홍구 씨 “이콘을 그리다 보니 사람들이 자꾸 저에게 이것저것 물어오는 거예요. 우선 제가 정말 궁금했고, 물어 오는 질문들에 정확히 대답하고 싶어 신학공부도 했지요.”
외국생활을 오래 한 그로서는 낯선(?) 고국이 될 수도 있다. 호탕하고 개방적인 성격 탓에 적응하는 데도 꽤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그가 신고 있는 하얀 고무신에서도 알 수 있듯, 한국적인 정서가 그의 내면에 깊숙이 깔려 있는 듯 하다.
얼마 전 요셉의 집 식구들에게 김장을 해주었다. 발비나 씨는 “화백님이 음식을 정말 잘하셔요.”라며 귀뜀해준다. 농담도 잘하고 연신 웃는 그는 단연 요셉의 집의 분위기 메이커. 먼 발치까지 나와 배웅하던 그와 헤어지며 돌아오는 길에 자꾸 그가 한 말이 귀에 맴돈다.
“저의 재능은 하느님으로부터 왔어요. 제것이 아니죠. 그러니 당연히 저의 재능을 남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 영광을 올리는 일이 아닐까요?” 덜 가지고 더 가진것에 상관없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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