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군의 첫 본당
1911년 10월 10일(화) 전남 나주(羅州)로 가기 위해 정읍(井邑) 신성리를 출발한 드망즈(안) 주교 일행은 나주 계량리(桂良里)본당의 카닥스(J.Cadars. 姜撻淳. 요셉) 신부가 짐꾼 두 사람 외에는 안내인을 보내지 않아 미알롱(맹) 신부와 신성리의 젊은이들이 주교를 수행하였다. 주교 일행은 말(馬)을 탔지만, 달리지는 못한 보행이었으므로 나주까지 하루만에 갈 수 없어, 도중에 장성(長城 月坪里)의 여관에 묵게 되었다. 그러나 방이 부족하여 거기서는 방을 구하기 어려웠다. 주교와 미알롱(맹) 신부는 반 칸을 빌려, 옆으로 나란히 붙어 자게 되었으며, 다음 날인 10월 11일(수) 오후에 계량리본당(羅州郡 二老面 桂良里 天主堂)에 도착했다. 카닥스(강) 신부는 그의 집에서 30분 정도 걸리는 곳까지 마중 나와 있었다.
나주 계량본당은 현재 광주교구의 노안(老安)본당의 전신으로 나주 노안은 나주군의 북부에 있는 기름지고 살기 좋은 농경지대이다. 노안지방에 복음의 씨앗이 심어진 것은 1894년 경으로 서울에서 함평군 나산면으로 이주해 온 교우 정락(鄭洛. 요한)이 이곳에 살던 이민숙(李民淑. 바울로)과 이진서(李震緖. 토마) 두 사람을 입교시킨 것을 계기로 전교가 시작되었다. 이 때는 전라도 출신의 첫 방인 사제 이내수(아우구스티노) 신부가 무안(務安)지방 전교를 맡아 있을 무렵이며, 나주 지방에도 천주교가 점차 발전하는 시기였다. 그러나 불행히 1900년 12월 20일 이내수 신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무안지방을 목포본당의 데사예(A.Deshayes. 曺有道) 신부가 돌봐주게 되어 5년 간 내왕하면서 사목하여 발전하였다. 1906년 데사예(조) 신부가 함경남도 원산(元山)으로 전임되고 투르뇌(V.Tourneux. 呂東宣) 신부가 목포본당 주임으로 임명되어 나주지방까지 돌보게 되었다.
투르뇌(여) 신부는 계량본당 설립 준비로 대지 약 3,000평과 임야 약간 평을 매입하여 십자형 초가(草家)성당을(약 40평) 세워 본당을 설립하게 하였다. 계량본당이 정식으로 설정된 것은 1908년 11월 18일이다. 그리고 사제 서품을 받고 조선교구로 배속되어 1909년 1월 31일 조선에 입국한 요셉 카닥스(강) 신부가 서울에서 우리말과 풍습을 배우는 포교 활동 준비기간이 끝나자 계량본당 초대주임으로 부임한다. 요셉 강신부는 양옥으로 사제관을 신축하고 성당기지를 준비했다. 주교의 순방 당시 아직 신설본당인 계량본당은 관하에 9개 공소가 있고, 신자 수는 291명이었다.
드망즈(안) 주교는 10월 12일(목)부터 14일(토)까지 계량에 머물렀다. 미알롱(맹) 신부는 13일(금) 신성리로 돌아가고, 이날 계량성당에서는 영세식과 견진 예식이 거행되어 영세자는 성인 10명, 견진자 40명이었다.
목포로 가는 지루한 뱃길
10월 15일(일) 드망즈(안) 주교일행은 다음 순방지 목포(木浦)를 향하여 카닥스(강) 신부와 함께 때때로 비를 맞으며 40리 길을 걸어, 저녁 무렵 작은 항구 영산포(榮山浦)에 도착했다. 자그마한 일본인 여관에서 저녁식사를 하면서 목포로 가는 작은 증기선(榮山丸)을 기다렸는데, 그 배(榮山丸)는 밤 9시에 출항한다. 주교 일행은 배에 올라 밤새도록 항해하고, 다음날(10월 16일) 오후 3시경 목포항에 입항하여 내려치는 빗속에 부두에 상륙했는데, 20여 시간의 지루하고 고생스런 뱃길이었다. 목포항 부두에는 목포본당의 투르뇌(여) 신부와 신자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한반도 서남단 관문
목포본당(務安郡 二老面 蓮洞 木浦 天主堂)은 1897년 목포항(木浦港)이 개항(開港)된 같은 해에 설립되었다. 전라남도에서 맨 처음 설립된 본당인데, 개항 당시 이곳은 10여 호 주민에 불과한 한적한 어촌(漁村)이라 신자가 없었다. 그래서 첫 본당 신부로 임명된 데사예(조) 신부는 순창(淳昌郡 雙置面 阿川里)에서 1년 동안 우거하였는데, 뮈텔(閔) 주교의 “선견지명(先見之明)”으로 결정된 것이다. 첫 본당신부로 임명된 데사예(조) 신부는 이기환 복사를 목포에 보내어 본당 기지를 물색하여 매입하도록 하고, 1898년 7월 북교동(北橋洞) 임시본당으로 부임했다. 이때에도 신자는 제물포(仁川)에서 이곳까지 벌이 나온 가난한 교우 3명뿐이었다. 데사예(조) 신부는 북교동에서 전교 하면서 유달산(儒達山) 기슭 산정동(山亭洞)에 3,500평의 부지를 마련하고 그 위에 벽돌집 성당과 사제관을 지었는데, 이 건물은 목포에서 최초로 건축된 서양식 건물이다.
한반도의 서남단(西南端) 무안반도의 영산강(榮山江)어귀에 자리한 항구도시 목포는 육지와 해로(海路)의 교통요지이며 어업기지이다. 제주도로 가는 길목인 이곳은 1901년 제주도 민란(民亂) 때 긴급한 연락을 맡았던 통신 중개 역할을 했다. 또한 제주도 교난 사건이 있었던(1901년) 9월에는 목포본당 관하의 신지도(新智島)에서 일제의 앞잡이 일진회(一進會)와 천주교 신자들 사이에 충돌 사건이 있었다.
1906년 데사예(조) 신부는 함경남도 원산(元山)본당으로 전임되고 위돌 투르뇌(여) 신부가 제 2대 목포본당 신부로 부임하였다. 훗날(1935년) 광주교구의 모체(母體)가 된 목포본당의 1911년 교세현황은 관하에 17개, 공소신자 918명이었다.
원산본당으로 전임된 개척자 데사예(曺有道) 신부는 1910년 2월 1일 원산에서 선종하였다. 제 2대 주임 위돌 투르뇌(呂東宣)신부는 경북 가실(洛山)본당으로 전임(1912년 6월 1일)되어 1943년 2월 18일까지 사목하다가 은퇴(대구주교관)한 후, 1944년 3월 20일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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