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은 누구나 각자에게 주어진 길을 가고 있다. 때로는 그것이 숙명일 수도 있는 그 길에서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운명 속에서 능동적인 자세를 취함으로써 자신의 것으로 확고히 만드는 사람이 있다.
사람과 자연, 그리고 안식과 평화가 어우러진 성모당과 인접해 있는 대구대교구청. 그 곳에서 생활하시는 김영환(베네딕도, 72세) 몬시뇰을 만나 뵈었다.
금테 안경, 백발 머리카락으로 인해 더욱 이지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몬시뇰은 1957년 12월 21일 로마의 울바노 대학에서 사제품을 받으심으로써 사목자의 길에 들어셨으며, 그 후 1991년 6월 18일, 몬시뇰서임을 받으셨다.
1966년 액션단체 지도신부로 임명되셨을 때가 가장 힘들고 보람이 컸던 해라고 말씀하시는 몬시뇰. “14개 단체였네, 그걸 혼자 다 맡아서 했는데, 초창기여서 만들어져 있던 규칙도, 방식도 없어서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지만, 하나씩 자리잡혀 가는 것을 볼 때마다 마음이 뿌듯하더구만.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적극적이질 못한 것 같네, 물질이 풍요로워야 활동을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고, 자꾸 대형화를 만들려 하고 있네.”라며 몬시뇰은 지금의 단체들에 대해 우려의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1975년 광주가톨릭대학 교학처장을 시작으로 대학원장과 학장을 거쳐, 1986년에는 대구가톨릭대학(옛 효성여자대학교)으로 옮겨 대학원장과 부총장, 총장을 지내셨다. 45년의 사목생활 중 36년을 교육기관에서 학생들과 함께 하시며, 후학양성에 힘써 오신 김영환 몬시뇰. 2000년 4월 2일, 공식적으로 은퇴 하셨지만, 지금도 대구 관구법원장을 비롯하여 재중한인 지도신부, 운전기사사도회 지도신부로 활약하고 계신다.
몬시뇰은 사제가 된 것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부모님께서 신앙심이 아주 깊었네. 나에게 말씀을 하실 때는 꼭 종교적인 속에서 엄한 가르침을 주시려 했지.” 자연스런 습관처럼 되어버린 삶 속에서 몬시뇰의 꿈은 신부가 되는 것이었고, 어릴 적 소꿉놀이 또한 사제를 대상으로 한 놀이였다. “나도 다른 신부님들과 다르지 않네. 다만 내가 생각한 길이 있었고, 그 길을 따라 오다 보니 사제가 된 것이지.” 다소 철학적으로 말씀을 덧붙인 몬시뇰.
돈보스꼬 성인의 사목적 메시지인 이성(理性), 종교(宗敎), 자애(慈愛)에 기초한 삶을 담고 싶다는 김영환 몬시뇰은 어려운 사람을 돕고, 필요한 곳에서 나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한평생 힘쓰며 살아오셨으며, 남은 삶 또한 그렇게 살아가실 것이다.
안일해지는 삶 속에서 주체성과 정체성을 상실해 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최선’이라는 단어로 성실을 강조하시는 몬시뇰.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이 시대에 가장 알맞는 해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싶다. 우리가 얼마나 그 속에서 책임감 있는 행동과 노력으로 임했는지, 또 그로 인해서 얻게 될 믿음과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그 분의 모습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깨달았으면 한다.
·몬시뇰 : 가톨릭 고위 성직자에 대한 경칭. 프랑스어가 어원인 몬시뇰(monseigneur)은 ‘나의 주님’ 이라는 의미가 있다. 한국에서는 주교품을 받지 아니한 원로 사제로서, 교황청으로 부터 이 명예 칭호를 받은 사람에게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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