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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성모 마리아


글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월간 〈빛〉 편집주간 겸 교구 문화홍보국장

 

431년 에페소 공의회는 성모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하면서 초세기부터 이어져 온 성모님에 대한 공경을 공식화했다. 1950년 교황 비오 12세는 성모 승천 교의를 반포하면서 교회 모든 구성원이 궁극에 바라는 천상의 삶을 보다 구체화했다. 성모님과 관련된 신앙은 사실 그리스도인이 ‘희망하는 삶’에 대한 염원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하느님과 그분의 생명을 향해 매순간 걸어가겠다는 신앙 의지가 성모님을 통해 발현된다.

우리 사회는 엄마, 어머니라는 말마디에 애틋하고 애절한 감정을 투사한다. 엄마, 어머니라고 부르며 눈물부터 짓는 또 다른 엄마, 어머니들이 많다. 가족을 위해 숱한 시간 희생과 극기의 삶을 제 삶으로 살아 낸 엄마, 어머니… 거기에 성모님을 향(통)한 신앙이 자주 어른거리고 성모님 앞에서 눈물지을 때가 많다.

허나, 가장 아름다운 계절 5월에 성모님을 기억하고 공경하는 것이 희생과 눈물의 스펙트럼 안에 갇히는 건 다소 아쉽다. 우리의 어머니와 우리의 성모님이 그저 ‘~을 위한 존재’로 기억된다면 곤란하다. 어머니의 고유한 삶과 의지와 원의가 제거된 모성애는 너무나 서럽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누군가가 성장하고 성숙한다는 논리는 촌스럽고 투박하기 이를 데 없다.

성모님은 강단있는 여성이었다. 처녀로서 아이를 갖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결연히 받아들이신다. 요셉 성인은 파혼을 결심했지만 성모님은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면서까지 하느님을 제 자식으로 받아들이셨다. 자식의 죽음 앞에서는 어떤가. 처절히 감당하며 십자가의 자리를 끝끝내 지켜내는 여인. 자신의 아들이 죽어가는 그 절박한 고통을 버티어 내는 그 놀라운 힘을 나는 도저히 겸손과 희생이라는 낯익어 익숙한 말마디로 수용할 수 없다.

교회가 성모님에 빗대어 생각한 요한 묵시록의 여인은 성모님에 대한 사유의 한계를 무용하게 만든다. 용으로 상징되는 태초의 악으로부터 메시아를 지켜내는 그 여인은 임금의 표상인 관을 쓰고 있다. 열두 개의 별이 달린 그 관은 하느님 백성의 총체를 가리킨다. 성모님은 힘없고 가련한 여염집 한 여인이 아니라 온 백성에게 메시아를 안겨 준 새 시대의 영웅으로 교회는 기억하고 묘사했다. 성모님은 고통의 문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감으로 기쁨과 구원의 문을 열어젖힌 믿는 이의 본령이다.

성모님의 삶은 고단하나 강인하다. 어쩌면 성경이 말하는 성모님의 ‘강인함’은 남성 위주의 유다 사회에 대한 하나의 경고이자 그로부터의 해방일 수 있겠다. 여성인 어머니를 참고 지켜야 할 가정에 국한시키는 사고에 대한 경고이고, 희생과 자기 상실을 하나의 미덕으로 강요하는 사회에 대한 저항이고 해방일 것이다. 성모님은 자신을 내려놓은 것이 아니라 닫힌 세상을 새로운 세상으로 열어 놓는 일에 적극적이셨다. 새로운 세상에 어머니 마리아는 첫발을 먼저 내디디셨고 그 뒤를 따르는 신앙인들은 어머니 마리아를 제 삶의 등불이자 모범으로 간직한다. 우리의 어머니를 바라보며 눈물짓기 보다 성모님처럼 강인하게 모진 시간을 겪어 낸 모든 어머니들에게 성모님의 이름으로 화사한 꽃다발을 안기는 5월이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5월은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라 가장 밝은 웃음으로 세상 모든 어머니들 앞에 고개 숙이는 축제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제 그만 엄마, 어머니를 부르며 눈물짓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