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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다리
“Mulier ecce filius tuus. Ecce mater tua?(요한 19,26
-27)


글 이한웅 사도 요한 신부|후쿠오카교구 선교 사목

계절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5월은 가정의 달이자 성모 성월입니다. 해마다 신록이 무성해지는 5월이 되면 드넓은 대지의 품 안에서 새 생명이 움터 자라나듯, 하늘 같은 성모님의 품 안에서 우리 신앙인의 내적 생명이 자라나고 있음을 상기하게 됩니다. 더불어 서로가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 주는 가족의 소중함도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가정의 달인 5월에 우리를 세상에 낳아 주고 길러 주신 어버이의 은혜를 마음에 되새기듯이, 하느님 자녀들을 위해 늘 전구하고 보호해 주시는 성모님의 사랑을 되새기며 5월의 징검다리를 놓아 봅니다.

사제품을 받고 신부로 부임된 첫 본당은 후쿠오카교구의 주교좌성당인 다이묘마치 성당이었습니다. 일본 대신학원 재학 중에 방학이 되면 돌아갈 집이 없던 저에게 있어서 주교좌성당은 ”다녀왔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의 친정과 같은 곳이었는데, 사제가 되기까지 저를 ‘어머니처럼’ 보살펴 주고 응원해 준 곳에 부임되어 그동안 신세를 진 공동체에 이제는 사제로서 은혜를 갚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무척 기뻤습니다. 덕분에 매일 지칠 줄 모르고 열정적으로 지낼 수 있었고, 모든 활동이 사제로서 처음이었기에 하루하루가 설렘과 보람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첫 본당에서의 일과는 루틴이 정해져 있었는데 규칙적인 생활은 사제 직무에 익숙해지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월, 수, 금은 인근의 수도원(adoratrices 수녀회)에서 미사를 드린 뒤 유치원에 출근하는 날이고, 화요일에는 병자봉성체를 다녔습니다. 일본이 일찍이 초고령화 사회에 들어섰기 때문인지 봉성체 대상자 목록에는 당시 40명이 넘는 분이 등록되어 있어 화요일마다 봉성체를 다녀도 대상자는 한 달에 한 번 겨우 성체를 영하는게 보통이었습니다. 목요일 오전 10시와 오후 7시에는 예비신자교리반을, 중간 시간대인 오후 2시에는 성경교리반이 있었습니다. 매주 강의자료를 준비하며 신학교에서 배운 것들을 다시금 공부할 수 있었기에 사제생활에 보탬이 된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토요일 오전에는 성당 대청소를 마친 뒤 공소에서 주일미사를 드리기 위해 오후에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갔습니다. 날씨가 좋을 땐 조금 일찍 출발해서 섬을 산책하곤 했는데 공소 바로 위에 고즈넉한 공원이 있어서 바닷바람을 쐬며 여유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주일에는 미사를 드린 뒤 주일학교와 청년회 활동을 하며 근처로 피크닉을 가는 등 젊은 신부답게 생기있는 시간을 만끽했습니다.

주교좌성당의 보좌로 지내면서 저는 “지금까지 이 공동체 안에서 아들처럼 보살핌을 받았으니 이제는 이 공동체의 신부(神父)로서 든든한 ‘아버지’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시오.”라는 지향으로 기도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날 기도하는 중에 저의 가슴을 파고든 주님의 말씀은 주교좌성당의 십자가에 새겨진 요한복음의 한 구절(요한 19,26-27)이었습니다. “Mulier ecce filius tuus. Ecce mater tua.(보십시오, 당신의 아들입니다. 보라, 네 어머니시다.)” 공동체의 아버지가 되게 해 달라고 청하는 저에게 주님께서는 “네가 지금 사목하는 공동체가 네 ‘어머니’시다.”라고 독려하는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의 부족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기에 앞으로도 어머니이신 교회 안에서 제가 더 배우고 자라길 바라신다고 생각하며 이 말씀을 마음 한구석에 새겨 두었습니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그날 제 가슴을 파고든 주님의 말씀대로 주교좌성당의 주임신부님과 공동체는 저에게 한결같이 어머니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주임신부님께서는 인내심을 가지고 새 사제인 저를 가르치며 이끌어 주셨고, 열정만 가득한 제가 혹여 무리해서 몸이 상하지 않을까 하는 어버이 같은 마음으로 보살펴 주셨습니다. 매주 성경교리반의 신자 분들은 어떻게든 제 살을 찌우려고 손수 만드신 반찬을 가지고 오셔서 어머니처럼 챙겨 주셨는데, 좀처럼 제가 살이 찌지 않아 속상해 하시는 모습까지 꼭 아들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마음 같았습니다. 매일 아침 평일 미사에 오시는 신자 분들은 미사가 봉헌되기 한 시간 전부터 오셔서 사제를 위해 묵주신공을 바쳐 주셨고, 인근 수도원에서 미사를 드리는 날엔 수녀님들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면서 가족과 함께하는 듯한 포근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 매주 토요일에 노코노시마 공소에 가면 어르신들이 섬바다에서 손수 낚은 신선한 물고기로 회를 떠 주셔서 마치 손자가 할머니댁에 놀러 가는 것처럼 마냥 즐거웠습니다.

후쿠오카교구 내에 사제 수가 부족하여 이듬해에는 새로운 부임지로 떠날 수밖에 없었지만 제게 ‘어머니’ 같았던 주교좌성당 공동체는 아기 새가 다 커서(소다치) 이제껏 살던 둥지를 떠나 보내는(스다치) 어미 새처럼 저를 새로운 공동체로 배웅해 주셨습니다. 둥지를 떠났지만 저는 아직도 어설프게 날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제가 언젠가는 어버이와 같은 넓고 깊은 마음을 품은 사목자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시는 수많은 어머니들의 응원이 있기에, 저는 오늘도 부족하나마 사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5월 성모 성월, 어머니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며 교회의 모든 어머니를 위해서 기도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