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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시절-안주교의 호남지방 사목순방(5)
수류(水流)와 정읍(井邑) 교회


윤광선 (비오). 영남교회사연구소 명예소장

호남교회 근원지방

1911년 9월 29일(금요일) 진안(鎭安) 어은동(魚隱洞)을 떠나 전주(全州)로 돌아온 드망즈(안) 주교 일행은 9월 30일(토요일) 베르모렐(장요셉) 부주교와 보두네(윤 사베리오), 김 스테파노(金洋洪) 신부들과 함께 수류(김제군 금산면 화율리 水流 天主堂) 본당을 방문하였다. 수류지방은 호남교회 초창기에 고산되재(升峙), 나바위와 더불어 3대 원류(근원)가 되는 곳이다.

 

1888년부터 이 지방을 순회전교하던 베르모렐(장요셉) 신부가 용산 신학교 교수로 전임되면서 후임으로 영남의 부산(釜山)본당 첫 주임이던 모이세 조조(M.Jozeau. 趙得夏. 1866-1894) 신부가 1894년 전라도로 부임하여 김제 배재(梨峴)를 근거지로 용왕골·으럼골·함열 등 지방을 순회사목 했다. 그러다가 1894년 동학란(東學亂)과 청일(淸日)전쟁의 와중에 전라도의 교회사정을 주교에게 보고하기 위해 서울로 상경하던 도중, 충청도 공주(公州 玉龍洞)에서 청국군 패잔병에게 붙들려 피살당하였다.

 

1895년 5월 9일 모이세 조조(趙) 신부의 후임으로 말셀로 라크루(M.Lacrouts. 具瑪瑟. 1871-1929) 신부가 배재(梨峴)에 부임하였다. 라크루(구 말셀로)신부는 “이제 시대가 변하여 외국인에 대한 지방민의 배척과 적대감도 완화되었으므로 교회가 두메 산골에 은거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하여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읍으로 진출할 것을 결정했다. 그래서 적당한 본당 터전을 찾던 가운데 수류에 있는 전주의 이 진사 재실을 사들여서 수류본당을 설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1895년 10월 이 진사의 20칸 재실을 1,000냥에 구입하여 안채는 사제관으로, 행랑채는 임시성당으로 개조했는데, ㄱ자형 한옥의 연결부에 제대를 설치하고, 좌우 날개에 남교우·여교우 자리를 구분하였다.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 화율리에 위치한 수류는 노령산맥의 주봉인 무악산 상두산 국사봉으로 둘러 싸인 곳이다.

 

구신부와 배신부의 교대

1900년 5월 4일 교구의 인사이동으로 라크루(구 말셀로) 신부가 제주도의 제주읍 본당으로 전임되었다. 그리고  첫 주임 쟌 가롤로 페네(J.C.Peynet. 裴加菉. 1873-1948) 신부가 수류본당 주임으로 교대되어 부임하였는데, 페네(배) 신부는 본성당을 신축하기로 결정하였다. 페네(배) 신부의 설계로 1900년에 착공하여 1907년에 준공된 수류성당은 48칸의 목조한옥으로 구조와 외관은 전통적 한국목조 건축양식을 따른 토착화 된 교회건축으로, 나바위성당의 처음 모습과 비슷하였다.(6·25전란때 소실). 페네(배) 신부는 1908년 4년제 보통학교인 사립(私立) 천주교 인명(仁明)학교를 설립·개교하였다. 1911년 당시 수류본당 교세는 소속공소 20개, 신자총수 2,755명이었다.

 

안주교 순방 일기

9월 30일(계속) …깃발과 보병 나팔을 든 학생들이 20리까지 우리를 마중 나왔다. 미알롱(A.Mialon. 孟錫浩. 1871-1937)신부와 페네(배) 신부를 만났다. 10월 1일(일요일) 매괴첨례(로사리오 축일), 수류성당의 장엄한 강복식(헌당식)이 있었다. 종(鍾) 세례식, 성체강복, 견진성사 그리고 저녁때는 장식조명과 학교 축제가 행해졌다. 10월 2일(월요일) 오전에 성인(成人)영세 예식, 오후에는 학교 건물을 강복했다. 기침을 심하게 하고 식욕을 잃고 잠을 못 이루는 페네(배)신부를 홍콩으로 보내어 휴양토록 해야겠는데, 페네(배)신부가 없는 동안 투루뇌(V.Tourneux. 呂東宣. 1879-1944) 신부가 페네(배) 신부를 대신하게 되어 목포(木浦)는 공석이 될 것이다. 10월 3일(화요일) 신부들이 떠났다. 나는 5일까지 수류에 남아 있을 것이다. 10월 6일(금요일) 페네(배) 신부와 함께 신성리(井邑郡 南一面 新城里)로 갔다.

 

정읍 신성리본당

정읍(井邑) 신성리(新城里)본당은 1903년에 설정되어 이때 제 2대 주임 미알롱(孟錫浩)신부가 사목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정읍군은 우리 나라 8경(八景)의 하나인 내장산이 있는 곳으로, 광주(光州)·순창(淳昌)·고창(高敞)·부안(扶安) 등 지방과의 교통의 요지이다. 정읍에 복음의 씨가 심어진 것은 1882년경부터인데, 전주에서 이곳 신성리로 옮겨 살게 된 김순문(金淳文) 집안과 그 이듬해에  이 지방으로 이사온 배사진(裵四鎭), 김명보(金明寶)  등 신자가정이 합쳐서  4가문 27명 가족이 중심이 되어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 당시 김제 배재(梨峴)를 임시 근거지로 이 지방 전교를 담당하였던 베르모렐(장요셉) 신부가 1889년부터 이곳을 공소로 순회전교 하다가 용산 신학교로 전임되자, 전주의 보두네(윤 사베리오) 신부가 이 지방을 돌보았다. 그리고 1897년부터는 목포(木浦) 본당을 신설한 드예(A.Deshayes. 曺有道. 1871-1910) 신부가 순창(淳昌) 아천리에 있을 때 이 지방을 돌보다가 목포로 간 다음에도 계속 1903년 4월 정읍본당이 설정될 때까지 순회전교를 담당하였다.

 

정읍본당의 설정

정읍 신성리 첫 본당 신부는 1900년 9월 22일 김 스테파노(金洋洪)신부와 함께 서품된 방인 김 아우구스티노(金承淵) 신부로, 1901년 무안(務安) 우적동으로 발령을 받았다가 정읍본당 첫 주임이 되었다. 정읍 신성리 본당은 설립 당시 수류본당 관하의 정읍·순창·담양·창평·장성·고창·홍덕·무창 등 23개 공소의 신자 1,111명을 분할 받았는데, 본당을 담당할 신성리는 30가구 중 교우는 6가구 60명이었다. 한 면(面)에 공소가 많은 신성리와 가장 많은 신자가 살고 있는 등천리가 서로 신부를 모시려고 경쟁이 되어 신성리의 대표 임정수, 배사진과 등천리의 대표 조명서, 주명진 등이 옥식각신 했는데, 김승연 신부가 신성리에 본당을 세울 것을 결정하였다.

 

김승연 신부는 신성리에 임시 성당으로 사용할 4칸 짜리 집과 1,200평 부지를 360냥에 매입하였다. 김승연 신부는 4년간 신설본당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1907년 5월 경상북도 영천(永川)군 화산면 용평(龍坪)의 신설본당 주임으로 전임되고, 정읍 본당에는 1년간 홍콩에서 요양하던 미알롱(맹) 신부가 제 12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1911년 10월 정읍 신성리 본당을 방문한 드망즈(안) 주교 일행은 7∼9일까지 3일간 머물면서 사목시찰을 하고, 10월 10일 다음 순방지(나주 계량리)를 향해 미알롱(맹) 신부와 함께 신성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