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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시선
세상을 향한 가톨릭 교회의 외침


글 이재근 레오 신부|월간 〈빛〉 편집부장 겸 교구 문화홍보국 차장

 

모든 사람은 존엄하다. 하느님의 모상이기 때문이다.(창세 1,26) 그래서 사람이라면, 성별과 인종, 장애와 상관없이 모두 존중되어야 한다. 국가는 이러한 인간 존엄성을 구체적으로 지켜주기 위해 ‘인권’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인권이 도덕적 수준이 되어 버렸다. 법적 구속력이 사라져 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인권을 강조하지만 현실 속에서는 개인주의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이익만을 챙긴다. 그러다 보니 힘있는 사람들을 위한 법은 쉽게 생겨나고 약자들, 소수자를 위한 법률은 속도가 매우 더디거나 아예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번달 ‘빛의 시선’은 현시대를 향한 교회의 목소리, 사회교리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려 한다.

 

사회교리

가톨릭 사회교리란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되는 사회 문제에 대해 가톨릭 교회가 역사 안에서 발전시켜 온 모든 이론과 사상을 의미한다. 특히 오늘날에는 현시대의 문제점들에 대해 교황이나 각국의 주교회의가 응답한 모든 내용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인간 존엄성이 무시되는 현시대에 대한 교회의 외침인 것이다. 2000년 전 예수님께서도 당시 사회에 대항하여 사회적 약자들을 우선적으로 돌보셨다. 이제는 그 역할을 교회가 하고 있다. 그 흔적이 사회교리인 것이다.

 

핵심주제

1891년 레오 13세 교황의 회칙 『새로운 사태』로 시작하여, 2005년 『간추린 사회교리』로 정리되는 가톨릭 사회교리는 인간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세 가지 원리, 공동선, 보조성, 연대성을 이야기해 왔다. 쉽게 설명하자면 모두가 잘 살아가기 위해(공동선) 서로 친교를 맺고 공동체를 만들어 가며(연대성) 상대적으로 도태된 누군가 도움을 요청하면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것이다.(보조성) 그렇다면 이 세 가지 원리를 통해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개인이 아닌 ‘공동체’ 안에서 ‘인간 존엄성’이 실현되는 것이다.

가톨릭 사회교리는 인간의 존엄성이 공동체(사회) 안에서 실현될 수 있다고 봤다. 그래서 서로 간의 친교를 중요시한다. 하지만 오늘 날의 사회는 친교에서 벗어나고 있다. 모든 시선을 나 자신에게로 돌리고 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인정받는 법, 남이 우습게 보지 못하게 만드는 법 등 관계를 통해 함께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 아닌 관계를 통해 나 자신이 드러나는 것만 이야기한다. SNS를 통해 친교를 맺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을 타인에게 자랑하고 있을 뿐이다. 공동체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 단체들도 마찬가지다. 마치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익 단체다. 이익 계산이 맞는 이들끼리 뭉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공동체나 사람에게 배타적이다. 그들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비판하고 배척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오늘날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개인주의에서 비롯되었다.

 

개인주의

개인주의는 인간의 존엄을 개인주의적 방식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이념이다. 개인의 자유가 중요하고 서로가 간섭하지 않으며 자신의 삶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것이 진정으로 인간이 존엄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큰 착각이다. 존엄성을 빙자해서 그냥 내 맘대로, 주위 신경쓰지 않고 나 편한대로 살겠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 결과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무관심, 빈번한 이혼과 가정파괴 범죄, 생명에 대한 경시현상과 생태환경의 파괴라는 결과가 나타났다. 그래서 교회의 외침이 간절히 필요하다. 인간의 존엄성은 개인이 아닌 서로 간의 친교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음을 이야기해야 한다. 하지만 교회가 낙태를 반대하고 사형제도 폐지에 대해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뒤떨어진 사고방식이라고 비판한다. 이미 세상이 변했다고 말한다. 변한 것은 맞다. 하지만 잘못된 방향으로 변했다면 누군가는 아니라고 외쳐야 한다. 나의 행복을 위해서 낙태가 필요하고 사형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정말 올바른 행복일까? 청소년 범죄가 벌어질 때마다 촉법소년의 나이 규정을 바꿔야 한다고 외치는 것은 정말 행복한 사회를 위한 외침일까? 구걸하는 이들을 돕기 보다는 그들을 비판하고 무시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어쩌면 행복을 빙자한 우리의 이기심은 아닐까?

 

마치면서

대림 제2주일은 인권 주일이다. 동시에 그 주간을 사회교리 주간으로 보낸다. 19세기 이래로 가톨릭 교회가 공식적으로 천명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시기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난한 이들을 단순히 자선의 대상으로 보면 안 된다는 점이다. 그냥 불쌍하니까 도와주는 게 아니다. 그런 마음속에는 친교가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행복이 될 수 있다는 전제 자체가 없다. 오히려 도와주었으니 이젠 그들을 잊고 살아가겠다는 이기심이 더 클 수도 있다. 2000년 전 예수님께서 사회적 약자들을 바라보셨던 그 눈빛으로 우리도 그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들에 대한 애정과 그들과 내가 함께 친교를 맺고 살아갈 때 진정 예수님께서 원하신 세상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더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