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해가 밝고 어느새 반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시간에 쫓기듯 살아가면 마음(心)을 잃는다(亡)고 하여 ‘바쁘다’고 합니다. 빡빡한 스케줄에 정신 없이 지내다 보면 시나브로 마음을 잃은 채 살아가고 있는게 아닌가 반성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수년 전 장신호(요한보스코) 교구 총대리 주교님께서 하신 말씀이 간혹 떠오르곤 합니다. “신부님, 일하지 마시고 사랑하십시오.” 예수 성심 성월인 6월에 우리를 사랑해서 세상에 오신 주님의 성심을 기리며, 우리도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그저 일하기 보다는 일 안에서 사랑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여섯 번째 징검다리를 놓아 보고자 합니다.
일본에서 서품을 받고 파견된 두 번째 본당은 주교관에 인접한 죠스이도오리성당과 대신학원과 가장 가까운 차야마성당이었습니다. 두 본당은 서로 가까우면서도 각기 개성이 뚜렷했습니다. 후쿠오카 시내에서 내로라하는 부자들이 사는 동네가 죠스이도오리인데, 미션 스쿨도 예속되어 있어서 공동체의 성향이 대도시본당의 분위기를 띠고 있었습니다. 반면 차야마성당은 일본의 오랜 신앙공동체인 나가사키의 섬 고토 출신의 신자가 공동체의 9할을 차지하고 있어 도심 속 시골본당의 분위기를 띠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두 본당을 오가며 원로사제이신 주임신부님을 도와 사목했었는데, 평일엔 차야마의 유치원 업무를 봐야 했기 때문에 저는 주임신부님의 배려로 차야마성당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두 본당에 대해 소개하는 게 마땅하겠지만 제가 주로 머물고 생활했던 차야마 공동체에 초점을 두고 나누어 보고 싶습니다.

차야마 공동체의 첫인상은 고즈넉한 섬마을에 온 듯한 푸근한 느낌이었습니다. 도심 한가운데에 이렇게 한 가족과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본당이 몇이나 있을까요. 저는 자연스레 한국의 제 출신본당인 작은 꽃 소화성당을 떠올렸고 지내는 동안 마치 본가로 돌아온 듯한 기분으로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본당 형제님들은 일을 마치면 주중에 한번 본당에 모여 저와 함께 식사를 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 주셨는데 이제와 돌이켜 보면 아마도 자취 생활을 하는 저를 위하는 마음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공동체 구성원의 대부분이 섬 출신이기 때문인지 일본사회에 만연한 개인주의적인 성향은커녕 작은 것도 서로 나누고자 하는 시골 정서가 공동체의 특징으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차야마 공동체와 금세 한 가족이 된 계기는 아마도 함께 땀을 흘리는 시간들이 많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지역민을 위해 본당공동체가 바자회를 개최하거나 대축일이면 떡방아로 찧은 떡을 함께 나누던 시간들, 아이들과 함께 모내기를 하러 가거나 때마다 텃밭에 가서 함께 땀을 흘리던 시간들이 저로 하여금 자연스레 본당공동체의 한 구성원이 되게 했습니다. 바자회에서는 본당 청년들과 함께 만든 떡볶이가 가장 큰 매출을 남겨서 한국인으로서 뿌듯하기도 했습니다. 차야마성당의 사제관 바로 옆에는 30평이나 되는 텃밭이 있었는데, 텃밭을 가꾸어 본 적도 없던 제가 본당 자매님들께 밭일을 배워 직접 재배한 유기농 채소로 건강한 식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공동체와 더불어 땀 흘린 제게 서서히 흙(Humus)냄새가 나기 시작할 때, 저는 비로소 흙냄새가 나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고 그 안에서 사람(Humanus)의 온기도 함께 느낄 수 있었습니다.

차야마의 흙냄새를 좋아하는 것은 본당공동체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엔 교구 청년 담당사제도 겸임하고 있었는데 도심 속 시골본당의 매력을 느낀(?) 교구청년들이 청소년캠프준비를 위해 차야마성당에 자주 모이곤 했습니다. 한번은 회의를 마치고 텃밭에서 제가 가꾼 깻잎으로 함께 쌈을 싸 먹은 적이 있었는데 깻잎을 생전 처음 먹어보는 청년들의 일그러진 표정이 잊히질 않습니다. 일본인들은 깻잎을 먹지 않고 ‘시소’라는 잎채소를 먹기 때문에 그들의 입맛엔 무척 생소했을 것입니다. 제겐 무척 싱그러운 깻잎 향이 일본인들에겐 너무 강하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그래도 상추는 맛있는지 한국 고유의 식문화인 쌈을 굉장히 좋아해 회의가 끝나면 밭에서 재배한 상추를 따서 자주 쌈을 싸 먹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함께 땀 흘려 밭을 갈아 너 나 할 것 없이 흙냄새가 나는 소박하고 겸허한(Humilitatis) 차야마성당에서 지낸 시간들이 제게 농부의 마음을 가르쳐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심기만 해서는 작물이 잘 자랄 수 없듯이 함께 땀 흘려 밭을 가는 노력과 물을 주고 가꾸는 노력이 있어야만 수확의 기쁨이 있고, 함께 노력하는 만큼 더불어 가꾸는 밭(공동체)에 사랑이 기울여진다는 것을 그들 안에서 배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나라 관한 비유 말씀 속에서 자주 밭을 주제로 삼아 말씀하셨음을 생각하면 주님의 마음(聖心)이 어쩌면 농부의 마음과 비슷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추억이 된 차야마에서의 시간을 떠올리며 ‘일하지 말고 사랑하라.’는 장신호 교구 총대리 주교님의 말씀을 다시금 마음에 새깁니다. 예수 성심 성월에 모든 가정공동체와 본당공동체도 밭을 가꾸듯 함께 공동체를 위해 땀 흘려 노력하는 가운데 사랑으로 성장해 가길 바라며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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