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배’라는 단어는 더 이상 학교를 오래 다닌 고학번의 학생에게 후배가 붙여주는 호칭이 아닙니다. 학번과는 관계없이 나이가 어리면 아무리 후배라도 나이 많은 후배에게 그나마 친근하게 불러주는 호칭이 ‘선배’입니다. 친하지 않으면 아예 ‘~씨’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한동안 헷갈렸습니다. 틀림없이 1학년인데 ‘선배’라니? 뭐지? 그리고 ‘오빠’라고 부르는 호칭도 잘 들리지 않습니다. 왠만큼 친하지 않으면 여학생이 손위 남학생에게 오빠라고 불러 주지 않습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을까요? 세대 차이가 ‘호칭’에도 문화 차이를 만들어 버린 걸까요?
성당에서 교우들에게 피정 지도나 강의를 할 때면 ‘저는 무녀독남 외동아들입니다.’라고 얘기했을 때 예상되는 몇 가지 반응이 있습니다. 대부분 저보다 윗세대 어른들이 많다 보니 ‘무녀독남 외동아들이 결혼도 안 하는 신부가 되었다니? 부모님이 대단하시네’ 뭐 이런 반응이 대부분입니다. 당연합니다. 윗세대나 제 또래 친구들도 대부분 형제자매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 저는 학교에서 이런 표현을 거의 쓰지 않습니다. 형제없이 자란 사람이 특이한 시대가 아니니까요. 혼자 자란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 건지, 또래보다 성숙하고 독립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학생들이 있는 반면 아직도 부모님이 학교에 전화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학생이 대학교에 공존하고 있습니다.
같은 세대지만 살아가는 방식이 이렇게나 차이가 납니다. 너무나도 똑 부러지게 자신의 할 일을 찾아가는 학생들, 원하는 것, 이해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질문하는 학생, 오히려 교수들이나 어른들을 배려하고 챙겨 주려 하는 학생들은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건지 궁금합니다.
요즘 대학생들은 누구나 다 아는 ‘에브리타임’이라는 앱이 있습니다. 전국 대학생들이 거의 모두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앱에는 대학교마다 방이 따로 있어서 현재 그곳에 살고 있는 학생들의 이야기들이 현장감 있게 많이 올라옵니다. 물론 익명 게시판이 주를 이루고 있어서 건강하지 못하게 사용될 때도 많습니다. 그래도 소심한 학생들, 대인관계가 어려운 친구들의 소수 의견, 남몰래 앓고 있는 고민들이 올라오기 때문에 저도 한 번씩은 확인해 봅니다. 종종 ‘생활비가 없어서 자퇴를 해야 하나’, ‘생활비 대출은 어떻게 하는 건가?’, 한 달에 생활비는 얼마나 쓰고 사니?’ 뭐 이런 글들이 심심치 않게 올라옵니다. 대학교 등록비에 자취나 기숙사비, 생활비까지 포함하면 부모님의 도움 없이 대학교를 다닌다는 게 쉽지는 않은 게 현실입니다. 그래서 아르바이트나 교내외 근로를 하는 학생이 많습니다만 여기에도 속하지 못하는 학생들은 이렇게 익명 게시판에 자신들의 어려움을 토로합니다. 그러면 또 다른 익명의 학생은 마치 자신의 일처럼 함께 고민해 줍니다. 혹시 모를 장학제도도 알아봐 주고 힘내라는 응원도 해 줍니다. 그렇게 또 자기들만의 방법으로 어려움도 나누고 위로도 해 줍니다.
본당에서 있으면 한 번씩 자녀 고민하는 부모들이 찾아옵니다. “우리 아이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대부분 자녀와 대화가 단절된 상황이 되어 답답한 마음에 찾아옵니다. 그러면 속으로 제 대답은 늘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진작에 좀 오지.” 심지어 아들이 40대 후반인데도 찾아와서 ‘자녀와 대화가 안 된다.’, ‘얘가 뭐 하려고 저러는지 모르겠다.’, ‘매일 컴퓨터 앞에만 있고 집밖에 나가지도 않는다.’ 뭐 이런 이야기를 하는 부모가 있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요? 고민하는 부모님들에게는 참 죄송한 말씀이지만 부모의 잘못이 큰 게 아닌가 저는 그런 생각이 먼저 듭니다.

우리는 새로운 세대에게 새로운 미래를 열어 줄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온 시대와 그들이 살아갈 시대는 다르고, 그들의 미래를 우리는 감히 예측조차 할 수 없는 게 현실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시대가 안고 살아갈 문제를 그들만의 방식으로 그들끼리 해결해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그들이 아주 어릴 때에 스스로 소소한 문제를 풀어가며 자신감과 경험을 얻을 수 있도록, 그래서 ‘문제 해결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옆에서 기다려 주고 응원해 주는 일,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교육이 아닐까 합니다. 너무 많은 기대와 관심, 부모의 지나친 개입보다는 다정한 무관심, 사랑의 기다림, 기도하는 부모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훨씬 그들의 독립성을 키워 주는데 확실한 교육일 것입니다. 우리가 떠난 세상에서 결국 혼자 남겨질 우리의 자녀들이 하느님과 함께 이 세상을 잘 살아낼 수 있도록 우리는 오히려 우리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삶이란 하느님과 함께 살아내는 것이 진정한 지혜임을 몸소 보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대학교에는 참 다양하고 다른 색깔을 가진 학생들이 오늘을 살아내고 있습니다. 때로는 걱정스러운 친구들도 보이긴 하지만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이 시간을 치열하게 살아내고 있습니다. 치열하게 사는 젊은이들이 부디 하나의 세상이 될 수 있도록 응원합니다. 먼저 살아온 선배로서 ‘치열하게 살았더니 그래도 살만하더라.’ 삶으로 보여 주면서 한 발짝 옆에서 응원합니다. 저도 그들처럼 오늘을 살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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