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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7월 여름


글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월간 〈빛〉 편집주간 겸 교구 문화홍보국장

 

 

여름엔 왠지 쉬어야 할 것 같다. 더위가 버거워서 잠시 피하고 싶은 시간, 한해의 반을 살아 냈으니 이쯤에서 잠시 멈췄으면 하는 시간, 그게 7월을 맞닥뜨리는 마음들일까.

시간을 보내는 것과 시간을 읽어 내는 것엔 차이가 있다. 예전 군생활 중에 들었던 시간에 대한 이해는 거꾸로 달아 놓아도 돌아가는 시계로 갈음되었다. 흘려보내야만 했던, 시간을 읽는 것에 둔감해야만 했던 시간들… 그 속에서 나는 실체없는 국방부 시계를 채근하기만 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되뇌이며…

사실, 시간을 하느님 계시의 자리로 읽어 내는 신앙인에게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그리 달가운 말마디가 아니다. 계시가 시간과 결합하는 순간, 숨 쉬는 것조차 긴장감에 휩싸인다. 매사에 신중하고 매 순간을 가까스로 살아 내어야 한다. 행여 하느님의 뜻을 놓칠세라 시간의 흐름에 민감한 신앙은 이른바  ‘깨어있음이라는 익숙한 말마디로 재해석된다. 지금의 시간은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이라 결코 무심결에 지나쳐 버리면 안 된다. 악착같이 충실해야 할 시간이 지금이다. 이 또한 지나갈 그런 시간 따위는 복음서에 적혀 있지 않다.

그렇다고 시간에 매몰되어서도 안 된다. 깨어있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흘러가는 시간을 찬찬히 읽어 내는 긴 심호흡이다. 시간을 비켜나 흐르지 않는 진공의 멈춤을 기억하는 것이기도 하겠다. 그리하여 신앙인에게 있어 시간의 절정이자 본질은 ‘안식일’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히브리말로 ‘멈춤’을 가리키는 ‘사바트’, 곧 안식일은 나와 다른 존재가 있음을 기억하는, 그리하여 나의 시간을 멈추고 다른 이의 시간들을 진지하게 읽어 내는 진공의 시간이다. 프랑스 해석학자 폴 리쾨르는 시간을 두 가지 차원으로 이해한다. 물리적으로 흘러가는, 그래서 도무지 되살릴 수 없는 지난 시간들을 ‘죽은 시간’이라 하고, 늘 염두에 두고, 늘 기억하고 찬찬히 읽어 내는 시간을 기념비적 시간’이라고 칭한다. 멈추지 않고 달려왔던 시간들은 사실 죽어간 시간이고 진공의 시간에 맞닥뜨리는 수많은 시간들은 흘려보낼 시간이 아닌 영원히 곱씹고 읽어 내어야 하는 시간이다. 신앙인이 깨어있어 살아 내는 시간은 그러므로 영원성과 맞닿아 있어야 한다. 태초의 하느님을 곱씹고 종말의 하느님을 읽어 내는 것이 지금의 이 시간이어야 한다. 신앙인에게 모든 시간은 기념비적이다.

우연일까. 7월은 성월이 아니어서 딱히 기념해야 할 시간들이 없다. 자칫하면 겉도는 시간들로 흘려보내기 쉬운 7월, 그럼에도 우리에겐 매 순간을 기념비적인 시간으로 만들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이 자유는 시간에 대한 책임이기도 하다. 허투루 버려지거나 무시당하는 시간이 없도록, 다른 이의 시간들에 존중과 경의를 표하는, 그리하여 서로 다른 모든 시간들이 하느님의 계시가 살아 꿈틀거리는 자리가 된다는 사실을 되새기는 열정이 7월이 우리에게 주는 과업이다. 7월 여름은 그래서 매우 더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