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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시선
책임지는 사랑


글 이재근 레오 신부|월간 〈빛〉 편집부장 겸 교구 문화홍보국 차장

 

동거와 결혼

“자취를 할 때 동거를 하면 월세를 반반 부담해서 좋아요.”, “밤길이 무섭지 않아요.”, “서로 얼마나 잘 맞는지 결혼 전에 알아볼 수 있어서 좋아요.” 동거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의 말이다. 실제로 독일, 스웨덴, 프랑스 등에서는 동거가 보편화되어 있고 심지어 법을 통해 보호도 해 준다. 우리나라도 어느 순간 동거에 대해 긍정적인 청년들이 대폭 증가하였다. 동거에 대한 보편화는 필연적으로 결혼율의 감소로 이어진다. 분명 좀 더 나은 결혼생활을 위하여 동거를 지지한다고 해 놓고 실제 결과는 결혼율의 감소로 나타나고 있다. 이번 달에는 동거에 대한 가톨릭의 이유있는 반박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가톨릭 교회의 시대착오적인 발상?

동거를 반대하는 가톨릭 교회에 청년들은 “시대착오적이다.”라고 말한다. 이미 세상이 변했는데 교회는 흐름에 뒤쳐져 고리타분한 입장만 반복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교회의 태도 때문에 청년들이 성당을 떠나고 있다고도 말한다. 정말 가톨릭 교회는 시대착오적인 이야기만 하는 걸까? 몇몇 어른들이 옛 것이 옳고 요즘 것은 틀렸다고 고집을 피우는 것과 같은 행위를 하고 있는 걸까?

교회가 동거를 반대하는 이유는 ‘책임’ 때문이다. ‘사랑한다’는 행위에는 필연적으로 그에 맞는 책임이 뒤따른다. 이 책임은 상대방을 위한 배려에서부터 희생까지를 포함한다. 서로의 의견이 충돌할 때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해 보려는 노력, 상대방에 대한 감정이 소원해질 때 더 사랑하기 위한 노력 등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의 결심이고 노력이다. 하지만 많은 청년들에게 사랑은 단순히 반해있는 상태인 듯하다. 좋으니까 만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좋은 상태가 사라지면 헤어진다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그것은 사랑을 단순히 하나의 감정으로만 생각하는 오류이기 때문이다. 동거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비용 절감, 안전, 결혼 전 서로를 알아 갈 수 있다는 실용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만약 잘 맞지 않으면 헤어지겠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살아보기도 전에 이미 헤어질 수도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이다. 마치 결혼식을 올리면서 이혼에 대한 전제를 깔고 있는 것과 같다. 책임이 없다. 그래서 교회는 책임지지 않는 사랑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것이다. 동시에 책임지는 사랑인 결혼을 강조한다. 두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평생 함께하기로 결심하고, 약속하고, 교회는 증인이 되어 그들을 축복하고 지지한다. 이 약속에는 헤어짐에 대한 전제가 없다. 오로지 끝까지 ‘사랑하겠다는 결심’과 ‘결심에 대한 책임’이 있을 뿐이다.

결심, 사랑의 완성

얼마 전 신혼부부를 인터뷰했다. 그들에게 어떤 마음으로 결혼을 결심했는지 듣고 싶었다. 그리고 상대를 위해 어떤 사랑을 하고 싶은지도 듣고 싶었다. 결혼 연차가 지날수록 친구들과의 자리에서 배우자 욕을 하고 집 현관문이 지옥문 같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배우자의 편에 서는 사람, 자신의 배우자를 힘들게 하는 사람에게 진심으로 분노할 줄 아는 사람, 이것이 바로 부부의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연애 때의 설렘은 사라진지 오래지만 사랑을 이어가겠다는 결심은 그 어느 때보다 확고한 부부의 사랑이 바로 ‘사랑의 완성’이라 생각하기에 가톨릭 교회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앞으로도 결혼의 중요성을 강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