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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싶었습니다-은퇴사제를 찾아서 / 최봉도 신부
주님의 뜻을 전하는 사목도구


김선자(수산나) 본지기자

지금 이 시각 최봉도(F.하비에르, 71세) 신부님은 마음의 상처와 부담감을 호소하는 이들을 위해 ‘내적 치유’ 특강을 하시며, 다년간 쌓은 풍부한 경험과 체험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평화를 심고 계신다.

 

순리대로

제법 추워진 날씨가 겨울임을 알리는 이른 오전, 최봉도 신부님을 대구시 월성동성당 옆에 자리한 아파트촌에서 만났다. 1959년 3월 19일에 사제서품을 받으신 후, 은퇴하실 때까지 40여 년의 삶을 주님의 뜻을 전하는 사목도구(신부님께서 자신을 표현하신 말)로 살아오신 신부님. 비록 이제 은퇴하셔서 사목활동은 못하시지만 더 가까운 곳에서 신자들의 고민과 영적인 평화를 위해 애쓰고 계신다.

 

최봉도 신부님은 1931년 12월 2일 대구 남산동에서 6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최덕홍 주교님과 죽마고우였고, 한때 자신도 사제의 길을 가고자 했던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하루도 거르지 않고 평일 미사를 드렸다. 당연히 신부님의 어린시절 놀이터는 새벽마다 미사를 드러러 다니는 남산동 성당이었다.

 

“새벽미사에 다닐 때 너무 어두워서 길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몇 번이나 넘어졌지만, 그 고르지 못한 길을, 기어이 가족 전체를 데리고 다니신 아버지의 마음을 지금에 와 생각해 보면, 우리 형제들의 진로를 결정해 준 것이 아닌 가 싶네.”라며 회상하시는 신부님의 눈빛이 반짝였다. 할머니때부터 내려온 남다른 신앙심은 아버지를 거쳐 지금의 신부님과 수도자이신 누님을 만드셨고, 한번도 이 길이 아닌 다른 길이 자신에게 있을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풍족’이라는 말이 무색했던 그 시절, 늘 신부님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아버지의 맹목적인 지지와 사랑으로 하느님께 더욱 자신을 온전히 맡길 수 있었다는 신부님. 지치고 힘들던 그 때 하느님의 말씀안에서 진리와 평화를 찾을 수 있었다.

 

늘 나의 편이 되어 주셨던 하느님

사제가 된 후  여러 가지 이유로 많이 힘드셨다는 신부님은 항상 하느님이 자신의 옆에 계심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1959년 화원성당에 부임한 지 4개월만에 쓰러지신 최봉도 신부님은 3년 남짓한 시간의 휴양기간 동안 일반 신자들에게 어떻게 하면 하느님의 말씀을 보다 쉽게 그들의 생활속에 자리잡을 수 있을까 하며 보내셨다. 본당에 복귀하시고도 학문연구에 더욱 정진하셨다.

 

신부님은 사제생활 내내 하느님이 늘 나의 편에 계심을 깨달았던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단 돈 20만원을 가지고 평리성당을 짓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땅 고르는 작업 시작과 함께 돈은 바닥나고, 대구 섬유파동(신자들 대부분이 섬유직 관련업에 종사했었다.)까지 겹쳐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신자들의 절대적인 지지와 기도로 성전은 완공되었다. 그것은 주님께서 늘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신부님은 그때 ‘사목은 하느님이 하시고 자신은 도구일 뿐이다.’라는 진리를 깨달으셨다고 말씀하신다. “나는 하느님을 보필하는 보좌신부였고, 하느님이 주임신부였네.”하며 멋적은 웃음을 비추셨다.

 

현대사회의 급격한 발전에 따른 부작용들, 그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들이 부담감에서 탈피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도록 본당사목 시절의 경험과 꾸준히 해 오시던 학문연구의 결정체인 ‘내적치유’를 통해 신자들과 일대일 또는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강의를 하신다. 하느님과 나와의 친밀한 관계를 위해 기도생활을 강조하시는 신부님. 은퇴하신 지 2년째인 지금도 자신의 학문연구와 사제생활을 약속했던 ‘직책수행을 하면서 주님께 더 가까이 가자.’를 위해 오늘도 신부님의 일과는 고통받는 이들을 향해 달려가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