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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칼럼
“본전 생각”


글 정태우 아우구스티노 신부|이곡성당 주임

얼마 전 한 지인으로부터 자식과 다투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들이 그런대로 전망이 나쁘지 않은 회사에 다니는데, 더 나은 지위와 급여를 제공하겠다는 회사의 제안을 거절했단다. 여가를 즐기며 살고 싶기 때문에 무거운 책임이 따르는 위치에는 가지 않겠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부모 세대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사고방식일 수도 있겠지만, 바야흐로 세상은 당당하게 워라밸을 외치는 시대, 승진보다 휴가를 더 중시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너무 급속도로 바뀌는 것 같아 좀 적정스럽긴 하지만 그런 변화의 방향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휴식을 제대로 취하지 못하는 사회가 비정상적이고 불안하다고 생각한다. 당장 글쓴이만 해도 월요일의 휴식을 천금같이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가 말이다.

본당에서 일하는 신부가 쉬는 날은 통상 월요일이다. 하지만 이것은 무슨 법도 아니고 그냥 관습인데다가, 월요일에도 병자 성사를 청하는 교우가 있거나 장례가 나기도 하기 때문에 보장된 휴일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그런 급한 일도 아니면서 하필 월요일에 시간을 내 달라고 하는 경우도 가끔 있다. 그럴 때는 어째 손해 보는 느낌이 들어 속이 좀 상한다. 내가 이 월요일을 얼마나 기다리는데…. 신자가 신부를 청하는데 외면할 수는 없고, 투덜거리면서 마지못해 엉덩이를 들게 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좀 쉬시려고 외딴 곳으로 가셨다가도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군중을 보시고는 가엾은 마음에 쉬지 못하셨던 것(마르 6,31-34 참조)을 생각하면, 신부가 교우들에게 내 휴식을 침범하지 말라고 큰소리로 요구하는 것은 사실 온당하지 않다. 게다가 교우들도 그들의 휴식시간을 쪼개어 성당에 오지 않는가? 내가 월요일에 쉬는 것처럼 그들은 주일이 쉬는 날인데, 그 쉬는 날에 나와서 미사참례하고 봉사도 하고 하지 않는가? 물론 휴식과 여가는 서로 존중해야 마땅하지만, 주님과 이웃을 위해 내 시간을 내어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 내 시간이라고 말하지만 원래 주인을 따지자면 시간은 모두 주님의 것, 주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이다. 그리고 선물을 앞에 두고서 본전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것이다. 선물을 주신 분께 도리가 아니고, 또 잠깐의 휴식도 아쉬운 사람들에게 미안한 노릇이기 때문이다.

자기 시간을 슬기롭게 관리하고 더불어 남의 시간도 존중해 주는 감수성은 오늘날 점점 더 요긴해지고 있다. 취미나 여행 같은 여가 활동도 이제는 일부 한가한 이들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다. 하지만 이건 내 시간이니까 절대 건드릴 수 없다며 자기 권리만 주장하는 태도는 올바르지도 않고 현명하지도 않다. 시간을 정의롭게 잘 사용하기 위해서는 지혜가 있어야 하겠고, 그 위에 사랑이 가장 높은 판단 기준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중한 내 시간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나눌 줄 아는 마음,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여가 선용일 것이다.

내 인생의 한 조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시간을 기꺼이 내어주는 것은 말로는 쉬워도 막상 행하려 하면 정말 어렵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이 바로 월요일 오후인데, 이제라도 어느 교우가 신부님 꼭 좀 뵙고 싶은데 지금 되시겠습니까, 하면 인상 찌푸리지 않고 토 달지 않고 기분 좋게 예 시간 있습니다, 하고 응할 수 있을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주님께서 글쓴이의 너그럽지 못한 마음을 넓혀 주시기를 빈다.